활동품 30년 그리고 무지한 스승

20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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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30년 그리고 무지한 스승


심한기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센터장)




# 무지한 스승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

‘무지한 스승’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은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스승이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번역판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고 쓰면서 스승의 아무런 설명이 없이도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만든 조제프 자코토라는 스승의 위대한 지적 모험을 근거로 무지한 스승을 설명하고 있다. 조제프 자코토가 스승이라 호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배움을 향해 매진할 수 있도록 빠져나올 수 없는 코너에 몰아 놓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 나올 수 있는 기반과 여건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이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며, 자신의 지식이나 앎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즉 설명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스승이 바로 무지한 스승이다. 모든 사람은 설명을 듣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며. 교육은 능력의 문제가 아닌 의지와 태도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 인권 사상의 확장으로 인간은 교화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서양의 근대 사상이 지향했던 도덕적 이상을 집대성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사람은 교육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피조물이며,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고 아동 또는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와서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이 확산되며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누가 가르칠 것인가?’에 몰입하게 된다. 그 후 근대 권위주의에 대한 대항, 규정과 차별과 억압의 저항, 기존과 다른 문화적 변화의 요구 등을 통해서 새로운 현대교육의 관점들이 생겨나며 ‘어떻게 교육을 바꿀 것인가? 가르친다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에 서 있지만 우리의 공교육, 문화예술교육은 여전히 지적 스승, 경험과 능력이 많은 교사, 전문성을 지난 강사가 중심이 되는 근대적 관성들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교육에 대한 고정된 개념화가 아닌 다양함과 유연함의 담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예술교육 역시 교육의 관점들을 다시 해체하여 각자의 질문과 담론들을 찾아보고 시도해봐야 할 시점이다. 그 질문의 시작점에 ’무지한 스승‘의 의미들을 각자의 생각과 문제의식 속에 담아보려는 시도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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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을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책을 다 읽기 힘들다면 관련한 서평이나 글이라도 읽어보고 자신 또는 현재 일하고 있는 문화원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과 대입하여 또 다른 사유의 여행을 시도해보기를 제안한다.



# 품 30살, 나이를 먹은만큼의 유연함

품청소년문화공동체(이하 품)이 올해로 30살이 되었다. 30년이란 시간의 깊이와 넓이가 잘 잡히지도 않을 정도이지만 더 길고 깊은 역사와 서사를 담고 있는 지역문화원들에 비하면 아직 청년이다. 얼마 전 품 30살의 서사를 정리해보고 그동안의 시간들을 담은 기념행사를 하면서 다시 발견되어진 것들이 많았다. 오류와 실수도 많았고 바꿔가야 할 것들도 적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30살이란 나이가 부끄럽지만은 않은 이유가 있다. 정체되지 않으려는 노력, 끊임없이 움직이려는 내적 동기와 의지, 학습하고 기록하는 태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해석해보려는 시도들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연결성을 찾아왔고, 관계와 인연과 이야기의 기록과 재해석을 멈추지 않으며 나이를 먹는 만큼 유연해지고 있다. 나이를 먹는 만큼 유연해진다는 것은 버려야 할 것, 지켜가야 할 것,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것들에 대한 성찰과 통찰의 힘을 쌓아간다는 것이다.

 

품이 서울시로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이하 숨)은 이제 4년차 이지만 품 30년의 시간들을 녹여내며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멈추지 않고 있다. 숨은 MZ세대라고 퉁쳐서 호명되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에게 변하지 않을 본질은 무엇이고 매 시간 변화되는 역동은 무엇인지 그리고 개별존재의 차이를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황하지 않는다. 그간 품에서 축적된 직관과 유연함 때문이기도 하다. 일정표(정해진 프로그램)이 없는 캠프를 시도한 것도 10년이 넘었고, 청소년이 직접 기획하고 마을과 기성세대를 초대하는 축제를 이어온지도 20년이 넘었다. 이러한 직관과 유연함으로 숨에서는 청소년들이 당당하게 실패하고 시도할 권리를 응원하는 '청소년 십만원프로젝트'를 4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는 그 어떤 교사도 강사도 전문가도 없다. 교사나 강사나 전문가의 경험을 가진 자라도 이 과정의 정체성은 늘 그들을 응원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나누는 ’짝꿍‘이다. 청소년 스스로의 언어와 문화와 일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응원하는 역할이기에 숨의 짝꿍은 무지한 스승과도 닮아있다. 숨의 활동은 지역이나 마을을 토대로 하지만 지역과 마을을 넘어서는 시각과 시도 또한 중요하게 여긴다. 즉 마을을 배우는 것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마을에서 세상을 배워가는 것에 중심을 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마을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을 갖기 위한 설명이나 제안도 없다. 각 자의 욕망과 방식으로 사람과 마을과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응원하고 도울 뿐이지만 결국 각 자의 방식으로 사람과 마을과 세상을 이해하고 연결해낸다. 이를 위해서는 고정된 시간과 공간과 방식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정해진 시간, 내용, 강사, 공간'이라는 공식을 흔들어볼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을 만나는 활동가를 위한 '연구학교'>


또한 숨에서는 청소년을 만나는 활동가(기획자, 강사, 매개자 등)를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올해 진행되고 있는 ’활동가 연구학교‘는 우리 모두가 연구자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며 이미 정해진 정책이나 매뉴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쌓아가며 다양한 영역과 세대의 활동가들과의 교감과 응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잘하고 있는건가? 나에게 필요한 변화와 지혜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와 함께 협력하고 연대해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이 역시 개별과 집단의 통찰과 유연함을 축적해가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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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 없는 참맑은물살캠프 참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rg0pE83bQhE

<청소년이 기획하고 초대하는 축제 참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amOOxqELZl4 

<청소년 십만원 프로젝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 축제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1dH2JE5VwMg&t=54s 

<청소년 십만원프로젝트 가이드 북> 

https://baeum.org/27/?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1137535&t=board 

<활동가 연구학교 소개 글>

https://baeum.org/30/?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2363103&t=board




# 오래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나의 해방일지‘가 독보적인 배우들의 캐스팅이나 화려한 시나리오도 없이 많은 이에게 공감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영화와 같은 반전이 불가능한 현실의 삶 속에서 한 존재를 향한 ’웃어줄게, 환대해 줄게‘의 소중함인 것 같다. ’한 사람에게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온전한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는 진정한 환대를 실천하는 것‘은 공공의 영역에서 더욱 소중한 지향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환대의 어원(hote)은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즉 주인이면서 손님, 주인으로서의 손님이다. 기획자는 기획을 하고 관람자는 초대를 받고, 강사는 진행을 하고 참여자는 이를 따라가는 구분이 아닌 기획자와 관람자 또는 강사와 참여자의 경계를 흔들어가며 서로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는 환대의 시도는 공공단체나 기관의 해방과도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진정한 해방,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모든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진정한 해방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해방은 벗어남만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다시 바라봄으로 시작된다. 내가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제대로 감각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벗어나는 것이 최선인지, 유지하고 지켜가는 것이 최선인지, 새롭게 변화해야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해방이나 자유를 시도하기 위한 개인 또는 집단이 지닌 기준(근거)가 있어야 한다. 한 조직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유연해지고,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는 이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찾아가기 위한 개인과 집단의 노력과 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해방도 변화도 불가능하다.

 

철학자 최진석은 “보이는 대로 봐야 한다. 즉 지식과 경험에 지배되지 않는 눈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 지식과 경험은 하나의 관념 체계로 형성된 것이며 형성되는 순간 고집스러운 것으로 변화고 부패가 시작된다. 지식과 경험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말은 지식과 경험을 수단으로만 사용한다는 말이 될 것이고, 지식과 경험에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라고 했다. 오래된 조직이 축적해온 지식과 경험은 그 조직의 정체성과 지향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그것에 지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과 집단의 내적 자발성과 창발성들을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이를 많이 먹은 조직이 노화되고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은 만큼 지혜롭고 유연해질 수 있고, 오래된 것(사람, 장소, 문화)과 새로운 것의 연관성을 찾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다면 오래된 것으로부터 갇히지 않은 해방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