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십대와 마을배움 사업을 이야기하기 전에..
#.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마을배움터에서 십대 사업을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십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를 재정리해보는 것은 중요하며 일상적으로 삶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말한다. 좋은을 의미하는 에우와 영혼을 가리키는 다이몬을 합성한 것이다. ‘좋은 영혼’. 개인 존재의 본질이 좋은 상태를 뜻한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즐거운 감정을 넘어 자신의 영혼을 피워내고, 그것이 확장되어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행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좋은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추구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며 나와 주변을 돌보며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사회이다. 주변의 존재들이 부당하게 사라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관심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상한 시대에 ‘에우다이모니아’와 같은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십대와 청년에게는 또 다른 강요와 압박처럼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삶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좋은 삶을 찾아가는 과정, 그 속에서 나를 피워내는 시간은 중요하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도달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숨 가쁘게 뛰는 것보다 온전하게 존재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삶을 사유하며, 좋은 행위를 실천하며 가는 것이 곧 좋은 삶이지 않을까.
#. 삶을 만질 수 없는 교육
왜 아이들이 불만이 사라졌는가? 왜 아이들은 참는 게 미덕인냥 살아가는가? 내 또래의 처참한 죽음인 ‘세월호’ 사건을 보고도 금세 무감각해지는 아이들이 많은가? 지구에서 존재하는 ‘나’와 연결된 것들을 왜 느끼고 바라보지 못하는가? 자기 존재의 힘을 왜 살피지 못하는가? 에우다이모니아(좋은영혼)의 행복을 느끼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걸까?
다양한 원인 중 삶을 만질 수 없는 ‘교육’이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여백도 기회도 없고, 인간과 인간이 마찰하며 생겨나는 힘과 감정들의 경험이 부재하고, 내 삶과는 무관한 듯한(무관하듯 하게 배운) 지식을 잘 외우지 못해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삶이 실패할 것 같은 문화에 억눌리고, 그 안에서 두려움이 피어나는 그런 교육.. 그 과정에서 배움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은 잘려나갔으며 쓸모없는(쓸모없게 느껴지는) ‘죽은 지식’만 채워질 뿐이다.
십대를 보면 고질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다. 너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너의 꿈은?, 너의 미래는 무엇이냐? 무언가 직업적으로 목표를 빠르게 정해야 하며 그 목표에 정확하고 안전하고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 좋은 삶이며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하게 하는 질문인 것이다. 꼭 삶의 목표는 직업인냥 말이다. 직업으로서만 목표를 정하다보니 목표(직업,꿈)조차 없는 나를 보며 불안하고, 성장하지 못할까봐,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실패할까봐 불안하다. 그 불안은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십대가 온전한 존재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자기정체성을 세워가는 십대 시절에 겪는 삶과 분리된 교육(배움)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방향성을 정해가는 사유와 실천을 가로막으며, ‘나’, ‘타인’, ‘국가’, ‘지구’를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개인이 많은 사회를 낳는다. 십대에 집중하는 이유도 이와 연결된다.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삶을 느낄 수 있는 배움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품을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마을배움터 십대사업의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 본질을 잃은 ‘마을교육’
하도 삭막하고, 차가운 시대를 바라보게 되니 공동체와 마을이 화두로 떠오른 현상은 당연하게 인식된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교를 혁신하겠다며 모든 배움을 독점하고 있던 학교가 ‘마을’과의 ‘연계’를 이야기했다. ‘마을 결합형 혁신학교’, ‘자유학기제’, ‘마을 방과후’, ‘마을공동체 사업’, ‘마을교육’ 등.. 이제는 마을과의 결합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기존의 규정화되고 획일화된 그 굴레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실험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저 ‘연계’일 뿐이다. 오히려 해줄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있으니 빨리 너의 삶을 선택하라는 ‘새로운 방식의 강요’로 보일 뿐이며, 그 강요로 인해 자기 삶과 타인의 삶을 볼 틈을 또 한 번 앗아가고 있다. 오히려 이전에 마을교육이 유행스러운 화두처럼 떠오르지 않았을 때보다 지금 눈 가리고 아웅 하는듯하다.
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켜지는 생동감 있는 삶의 배움과 지혜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어떠한 ‘다른 것’에 대한 배움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마을’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의 삶처럼, 인간처럼 ‘비형식적’이며, ‘자연스러우며’, ‘일상적이며’, ‘통합적으로’ 삶 전반적인 과정에 녹아드는 배움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지속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전과 같이 살면서 배울 수 있는 당연스러운 배움을 현 시대에 마을배움터는 십대와 어떻게 그 시간들을 만들어 갈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해가야 할 것이다.
❐ 십대와 마을배움에서 무엇을 해나가야 할까.
1) 십대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처럼 부딪히고 충돌하며 재밌게 삶을 만져가기
경험으로서 풀어지는 것이 아직은 더 쉬운 고민정이기에 나의 경험으로써 연결시켜본다.
운이 좋게 ‘품’을 만나 ‘함께의 풍요로움’을 몸으로 먼저 느껴가며 배웠다. 대학을 다니며 오갔던 품의 경험을 통해 ‘공존’, ‘공유’, ‘연대’의 감각이 생겨난 듯하다. 그러다보니 보니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정신적 힘을 기르며 주변을 조금은 다르게 보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의 선택과 감정에 ‘민감함’을 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함께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하가는 시간들이 쌓였고, 타인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공감할 수 있는 꺼리가 늘어난다. 그 안에서 나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알아야 하는 것,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생활로써 시민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내가 숨 쉬는 이곳에서 나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함께 생각해가며 스스로 자기 일상을 만들어가려는 그런 삶. 그게 바로 민주시민으로서 풍요로운 삶이지 않을까.
배움터는 십대를 만날 때, 시민으로 함께 사는 이들을 늘려나가는 것, 그것들이 가능할 수 있는 씨앗을 나누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십대에게 대단한 것을 주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의 안정감과 즐거움 그리고 풍요로움을 느껴갈 과정과 시간, 새로운 삶의 가치들이 십대들의 삶에 녹아날 수 있는 작은 틈, 상상해보지 못했던(혹은 상상만 했던)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용기가 관계를 통해 매워지는 경험, 또래친구들과 동네 어른들 각자의 경험과 지혜가 모여 ‘나’이면서 ‘우리’들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존해가려는 노력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이 나의 삶과 나의 일상과 연결되어 스스로 해결해가는 것. 이러한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배움은 결과로서의 배움이 아닌 과정자체가 배움일 것이다. 결국엔 이 과정이 삶의 주체로서 설 수 있는 씨앗이자 시민으로서의 씨앗이 아닐까. 배움터에서는 시민교육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십대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처럼 부딪히고 충돌하며 재밌게 삶을 만져가는 방식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2)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지속가능한 힘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배움터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한다. 새 시대를 위한 혁명, 혁신, 개혁, 파괴와 같이 빠르고 압축적 변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빠른 성장을 위해 달려오며 압축된 시간들을 천천히 그리고 느슨하게 생활에서부터 풀어가는 느린 방식으로 풀어갈 때 좀 더 단단한 변화(지속가능성)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첫 담당자로서의 역할과 마을배움터의 시작이 함께 되며 무언가 결과적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함께 밀려오기도 했었다. 해야 하는 업무들이 너무나도 많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전보다 더 바쁘고 무기력해지고 더 순응하는 십대들과 마주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는 본질적 고민이 뒤로 가며 보여 지는 것(참여인원수, 십대의 보여지는 욕구 등)에 대한 압박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나에게 있는 해체해볼 필요가 있는 관성이기도 하다.
수치적 결과, 성과적 결과를 다른 시각으로 담아가고, 우리가 지향하는 배움과 보이지 않는 성장을 지지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공공성의 재해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십대 사업에서는 날 것의 아이들의 이야기, 눈빛, 표정, 삶의 태도 등 보이지 않는 성장과 소소한 활동들에 삶의 대한 질문과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마을배움터의 역할이자 해야 하는 도리로써 중요하다. 작은 변화라고 치부되어 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우리들의 지속가능성의 뿌리임인지 드러내야 한다. 마음으로 공감하고 같이 행할 수 있는 이들을 늘려나기 위해.
글쓴이 : 활동가 고민정
❐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십대와 마을배움 사업을 이야기하기 전에..
#.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마을배움터에서 십대 사업을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십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를 재정리해보는 것은 중요하며 일상적으로 삶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말한다. 좋은을 의미하는 에우와 영혼을 가리키는 다이몬을 합성한 것이다. ‘좋은 영혼’. 개인 존재의 본질이 좋은 상태를 뜻한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즐거운 감정을 넘어 자신의 영혼을 피워내고, 그것이 확장되어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행복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좋은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추구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며 나와 주변을 돌보며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사회이다. 주변의 존재들이 부당하게 사라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관심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상한 시대에 ‘에우다이모니아’와 같은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십대와 청년에게는 또 다른 강요와 압박처럼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삶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좋은 삶을 찾아가는 과정, 그 속에서 나를 피워내는 시간은 중요하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도달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숨 가쁘게 뛰는 것보다 온전하게 존재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삶을 사유하며, 좋은 행위를 실천하며 가는 것이 곧 좋은 삶이지 않을까.
#. 삶을 만질 수 없는 교육
왜 아이들이 불만이 사라졌는가? 왜 아이들은 참는 게 미덕인냥 살아가는가? 내 또래의 처참한 죽음인 ‘세월호’ 사건을 보고도 금세 무감각해지는 아이들이 많은가? 지구에서 존재하는 ‘나’와 연결된 것들을 왜 느끼고 바라보지 못하는가? 자기 존재의 힘을 왜 살피지 못하는가? 에우다이모니아(좋은영혼)의 행복을 느끼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걸까?
다양한 원인 중 삶을 만질 수 없는 ‘교육’이 그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여백도 기회도 없고, 인간과 인간이 마찰하며 생겨나는 힘과 감정들의 경험이 부재하고, 내 삶과는 무관한 듯한(무관하듯 하게 배운) 지식을 잘 외우지 못해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삶이 실패할 것 같은 문화에 억눌리고, 그 안에서 두려움이 피어나는 그런 교육.. 그 과정에서 배움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은 잘려나갔으며 쓸모없는(쓸모없게 느껴지는) ‘죽은 지식’만 채워질 뿐이다.
십대를 보면 고질적으로 하는 질문이 있다. 너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이니?, 너의 꿈은?, 너의 미래는 무엇이냐? 무언가 직업적으로 목표를 빠르게 정해야 하며 그 목표에 정확하고 안전하고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 좋은 삶이며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하게 하는 질문인 것이다. 꼭 삶의 목표는 직업인냥 말이다. 직업으로서만 목표를 정하다보니 목표(직업,꿈)조차 없는 나를 보며 불안하고, 성장하지 못할까봐,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실패할까봐 불안하다. 그 불안은 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십대가 온전한 존재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자기정체성을 세워가는 십대 시절에 겪는 삶과 분리된 교육(배움)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의 방향성을 정해가는 사유와 실천을 가로막으며, ‘나’, ‘타인’, ‘국가’, ‘지구’를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개인이 많은 사회를 낳는다. 십대에 집중하는 이유도 이와 연결된다.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삶을 느낄 수 있는 배움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품을 만들어갈 것인가. 이것이 마을배움터 십대사업의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 본질을 잃은 ‘마을교육’
하도 삭막하고, 차가운 시대를 바라보게 되니 공동체와 마을이 화두로 떠오른 현상은 당연하게 인식된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교를 혁신하겠다며 모든 배움을 독점하고 있던 학교가 ‘마을’과의 ‘연계’를 이야기했다. ‘마을 결합형 혁신학교’, ‘자유학기제’, ‘마을 방과후’, ‘마을공동체 사업’, ‘마을교육’ 등.. 이제는 마을과의 결합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기존의 규정화되고 획일화된 그 굴레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실험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저 ‘연계’일 뿐이다. 오히려 해줄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있으니 빨리 너의 삶을 선택하라는 ‘새로운 방식의 강요’로 보일 뿐이며, 그 강요로 인해 자기 삶과 타인의 삶을 볼 틈을 또 한 번 앗아가고 있다. 오히려 이전에 마을교육이 유행스러운 화두처럼 떠오르지 않았을 때보다 지금 눈 가리고 아웅 하는듯하다.
생활 안에서 자연스럽게 불러일으켜지는 생동감 있는 삶의 배움과 지혜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어떠한 ‘다른 것’에 대한 배움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마을’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의 삶처럼, 인간처럼 ‘비형식적’이며, ‘자연스러우며’, ‘일상적이며’, ‘통합적으로’ 삶 전반적인 과정에 녹아드는 배움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지속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전과 같이 살면서 배울 수 있는 당연스러운 배움을 현 시대에 마을배움터는 십대와 어떻게 그 시간들을 만들어 갈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해가야 할 것이다.
❐ 십대와 마을배움에서 무엇을 해나가야 할까.
1) 십대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처럼 부딪히고 충돌하며 재밌게 삶을 만져가기
경험으로서 풀어지는 것이 아직은 더 쉬운 고민정이기에 나의 경험으로써 연결시켜본다.
운이 좋게 ‘품’을 만나 ‘함께의 풍요로움’을 몸으로 먼저 느껴가며 배웠다. 대학을 다니며 오갔던 품의 경험을 통해 ‘공존’, ‘공유’, ‘연대’의 감각이 생겨난 듯하다. 그러다보니 보니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정신적 힘을 기르며 주변을 조금은 다르게 보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의 선택과 감정에 ‘민감함’을 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함께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하가는 시간들이 쌓였고, 타인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공감할 수 있는 꺼리가 늘어난다. 그 안에서 나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알아야 하는 것,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생활로써 시민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내가 숨 쉬는 이곳에서 나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함께 생각해가며 스스로 자기 일상을 만들어가려는 그런 삶. 그게 바로 민주시민으로서 풍요로운 삶이지 않을까.
배움터는 십대를 만날 때, 시민으로 함께 사는 이들을 늘려나가는 것, 그것들이 가능할 수 있는 씨앗을 나누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십대에게 대단한 것을 주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의 안정감과 즐거움 그리고 풍요로움을 느껴갈 과정과 시간, 새로운 삶의 가치들이 십대들의 삶에 녹아날 수 있는 작은 틈, 상상해보지 못했던(혹은 상상만 했던)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는 용기가 관계를 통해 매워지는 경험, 또래친구들과 동네 어른들 각자의 경험과 지혜가 모여 ‘나’이면서 ‘우리’들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 그 안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존해가려는 노력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이 나의 삶과 나의 일상과 연결되어 스스로 해결해가는 것. 이러한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배움은 결과로서의 배움이 아닌 과정자체가 배움일 것이다. 결국엔 이 과정이 삶의 주체로서 설 수 있는 씨앗이자 시민으로서의 씨앗이 아닐까. 배움터에서는 시민교육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십대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처럼 부딪히고 충돌하며 재밌게 삶을 만져가는 방식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2)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지속가능한 힘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배움터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한다. 새 시대를 위한 혁명, 혁신, 개혁, 파괴와 같이 빠르고 압축적 변화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빠른 성장을 위해 달려오며 압축된 시간들을 천천히 그리고 느슨하게 생활에서부터 풀어가는 느린 방식으로 풀어갈 때 좀 더 단단한 변화(지속가능성)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첫 담당자로서의 역할과 마을배움터의 시작이 함께 되며 무언가 결과적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함께 밀려오기도 했었다. 해야 하는 업무들이 너무나도 많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전보다 더 바쁘고 무기력해지고 더 순응하는 십대들과 마주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는 본질적 고민이 뒤로 가며 보여 지는 것(참여인원수, 십대의 보여지는 욕구 등)에 대한 압박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나에게 있는 해체해볼 필요가 있는 관성이기도 하다.
수치적 결과, 성과적 결과를 다른 시각으로 담아가고, 우리가 지향하는 배움과 보이지 않는 성장을 지지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공공성의 재해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십대 사업에서는 날 것의 아이들의 이야기, 눈빛, 표정, 삶의 태도 등 보이지 않는 성장과 소소한 활동들에 삶의 대한 질문과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마을배움터의 역할이자 해야 하는 도리로써 중요하다. 작은 변화라고 치부되어 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우리들의 지속가능성의 뿌리임인지 드러내야 한다. 마음으로 공감하고 같이 행할 수 있는 이들을 늘려나기 위해.
글쓴이 : 활동가 고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