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한 디지털 세상과 거대한 나와 우리
부산댁 김양희
나에게 디지털 기술들은
손발은 편안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
넓고 광대하지만, 그럴수록 소외되고 고립되는 외로움
인싸들처럼 ‘핫’하게 활용해 보고 싶지만, 따라가h주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
어쩌면 배우고 익힐 체력이 부족하고, 탐색하며 즐겨 볼 의지가 없는 것일지도
쫓아가고 있지만 압도당하고 싶지 않은 그것이다.
“ 당신은 디지털시대가 어디서 불편한가요?, 왜 그런가요? ”
쇼핑한 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걸을 때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길에 노숙인을 마주치면 마음이 무겁고 묘한 죄스러움이 든다. 디지털시대의 화려한 업적들이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이 마음과 같다.
왜 그런 걸까. 그 죄스러움에 대한 나의 책임분으로 첫 월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기부와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가 내게 주는 불편함은 무엇으로 책임지면 될까. 여러모로 살펴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잊지 않으려 기억하는 것이지.
위험을 담보로 달려야하는 배달앱의 라이더들, 고강도의 노동이 된 로켓배송, 새벽배송의 배달기사들, 키오스크와 셀프계산대 기계로 일자리에서 밀려난 누군가들. 내가 누리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편리함에는 누군가의 고단함과 상실이 있다. 사용을 중단하기엔 일상이 불편하고, 편리함을 누리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나의 생활과 소비가 이러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기에 붙잡고 살고 있다.
“ 슬랙을 안 썼다면 퇴사 했을까요?, 내부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나요? ”
내 생의 첫 메신저는 네이트온이다. 지금은 카카오톡과 슬랙(Slack)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문자가 되어 기록에 남고 보관된다. 여기에 기술이 더해져 주제별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대화와 자료를 기록하고 공유 할 수 있다. 이렇게 메신저를 즐겁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팀별 활동 상항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업무소통을 위해 협업툴 중 하나인 ‘슬랙’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자주 만나 회의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가 줄어들고 주로 슬랙과 팀별 단톡을 중심으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명의 활동가가 퇴사하게 된다. 그녀가 퇴사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엮여있다. 조직의 구조변화로 일자리가 줄 수밖에 없는 내부적인 요인, 고용주가 변경되면서 퇴사와 재입사라는 행정적인 요인 등 슬랙이 아니었어도 퇴사 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난 마치 슬랙이 슬쩍 그녀를 밀어낸 것만 같았다.
고개만 돌리면 건낼 수 있는 인사와 업무전달도 목소리 없이 키보드 타자소리와 화면의 입력값으로 오고갔다. 대면회의로 논의하고 결정되면 좋았을 안건들도 메신저에서 주고받다 마무리가 되었다. 그녀가 불편한 사람은 메신저로 소통하고 업무요청을 했다. 업무지시와 수정/보완 사안들도 슬랙을 통해 올라왔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들이 불편했다. 그녀는 얼마나 곤란하고 난감했을까, 이 정도는 두 사람이 직접 소통하거나 개인톡으로 전달하면 좋을 텐데, 왜 모두가 볼 수 있는 이 창에 올리는 걸까. 내가 당사자가 된 것처럼 불쾌하고 외톨이가 된 듯 외로웠다. 오히려 그녀는 담담하고 괜찮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메신저와 협업툴을 사용하기 전에도 대중 무리에서 반기는 이와 배척하는 이는 늘 있어왔다. 직장 내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풍경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자리에서 일어나던 일들이 이제는 온라인에서 내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보여 지고 드러난다. 관계에 민감하고 영향을 많이 받는 나로서는 마주보기 불편한 장면들이다.
일어난 사건은 중립적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나는 주관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점이다. 나는 나의 해석과 판단이 중립적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건들이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다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었다. 안성댁의 디지털리터러시 강의를 듣고 말하는 다른 이의 이야기들에서 내가 놓쳤거나 잊고 있었던 점들도 상기할 수 있었다. 나의 생각에 파묻혀서 지극히 주관적이었구나 하면서. 그럼에도 누군가의 어려움이 잊혀지지 않는다.
플랫폼을 통해 편리를 누리는 동안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힘겨울 수 있다는 사실. 내 집에서 자유로이 업무를 보고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동안 동료가 온라인에서 고립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상황에 당사자가 내가, 나의 가족이, 나의 아이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디지털 시대의 가속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데,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개입이 더디고 사회적 보완시스템을 마련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이 거대한 이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나의 몫, 우리의 몫이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힘없는 미세한 존재이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무수한 ‘나’들이 모여서 ‘우리’가 되고 ‘대중’이 되면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시스템이 보완되고 완충구가 생기길 요구하는 마음. 디지털시대에서 소외되고 고립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편리함에 젖어들어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마음. 이 마음들을 담아 관련된 책을 읽고, 영상을 보고,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해당 문제와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을 지지하여 제도에 다가가는 일.
이것들을 해내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미세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몫이니까.
그래서 자주 아이들과 이야기 한다. 기억하려고, 나의 아이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이다. 따뜻한 음식을 배달해주는 고마운 손, 먼 길을 달려와 물건을 옮겨주는 기사님들의 든든한 두 다리에 감사함을 전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세한 디지털 세상과 거대한 나와 우리
부산댁 김양희
나에게 디지털 기술들은
손발은 편안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
넓고 광대하지만, 그럴수록 소외되고 고립되는 외로움
인싸들처럼 ‘핫’하게 활용해 보고 싶지만, 따라가h주지 못하는 지금의 상태
어쩌면 배우고 익힐 체력이 부족하고, 탐색하며 즐겨 볼 의지가 없는 것일지도
쫓아가고 있지만 압도당하고 싶지 않은 그것이다.
“ 당신은 디지털시대가 어디서 불편한가요?, 왜 그런가요? ”
쇼핑한 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걸을 때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길에 노숙인을 마주치면 마음이 무겁고 묘한 죄스러움이 든다. 디지털시대의 화려한 업적들이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이 마음과 같다.
왜 그런 걸까. 그 죄스러움에 대한 나의 책임분으로 첫 월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기부와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가 내게 주는 불편함은 무엇으로 책임지면 될까. 여러모로 살펴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잊지 않으려 기억하는 것이지.
위험을 담보로 달려야하는 배달앱의 라이더들, 고강도의 노동이 된 로켓배송, 새벽배송의 배달기사들, 키오스크와 셀프계산대 기계로 일자리에서 밀려난 누군가들. 내가 누리고 있는 디지털시대의 편리함에는 누군가의 고단함과 상실이 있다. 사용을 중단하기엔 일상이 불편하고, 편리함을 누리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나의 생활과 소비가 이러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기에 붙잡고 살고 있다.
“ 슬랙을 안 썼다면 퇴사 했을까요?, 내부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나요? ”
내 생의 첫 메신저는 네이트온이다. 지금은 카카오톡과 슬랙(Slack)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문자가 되어 기록에 남고 보관된다. 여기에 기술이 더해져 주제별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대화와 자료를 기록하고 공유 할 수 있다. 이렇게 메신저를 즐겁고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팀별 활동 상항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업무소통을 위해 협업툴 중 하나인 ‘슬랙’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자주 만나 회의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가 줄어들고 주로 슬랙과 팀별 단톡을 중심으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명의 활동가가 퇴사하게 된다. 그녀가 퇴사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지점들이 복합적으로 엮여있다. 조직의 구조변화로 일자리가 줄 수밖에 없는 내부적인 요인, 고용주가 변경되면서 퇴사와 재입사라는 행정적인 요인 등 슬랙이 아니었어도 퇴사 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난 마치 슬랙이 슬쩍 그녀를 밀어낸 것만 같았다.
고개만 돌리면 건낼 수 있는 인사와 업무전달도 목소리 없이 키보드 타자소리와 화면의 입력값으로 오고갔다. 대면회의로 논의하고 결정되면 좋았을 안건들도 메신저에서 주고받다 마무리가 되었다. 그녀가 불편한 사람은 메신저로 소통하고 업무요청을 했다. 업무지시와 수정/보완 사안들도 슬랙을 통해 올라왔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들이 불편했다. 그녀는 얼마나 곤란하고 난감했을까, 이 정도는 두 사람이 직접 소통하거나 개인톡으로 전달하면 좋을 텐데, 왜 모두가 볼 수 있는 이 창에 올리는 걸까. 내가 당사자가 된 것처럼 불쾌하고 외톨이가 된 듯 외로웠다. 오히려 그녀는 담담하고 괜찮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메신저와 협업툴을 사용하기 전에도 대중 무리에서 반기는 이와 배척하는 이는 늘 있어왔다. 직장 내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풍경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자리에서 일어나던 일들이 이제는 온라인에서 내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이 보여 지고 드러난다. 관계에 민감하고 영향을 많이 받는 나로서는 마주보기 불편한 장면들이다.
일어난 사건은 중립적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나는 주관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점이다. 나는 나의 해석과 판단이 중립적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는 사건들이 편파적이거나 불공정하다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었다. 안성댁의 디지털리터러시 강의를 듣고 말하는 다른 이의 이야기들에서 내가 놓쳤거나 잊고 있었던 점들도 상기할 수 있었다. 나의 생각에 파묻혀서 지극히 주관적이었구나 하면서. 그럼에도 누군가의 어려움이 잊혀지지 않는다.
플랫폼을 통해 편리를 누리는 동안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힘겨울 수 있다는 사실. 내 집에서 자유로이 업무를 보고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동안 동료가 온라인에서 고립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상황에 당사자가 내가, 나의 가족이, 나의 아이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디지털 시대의 가속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데,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개입이 더디고 사회적 보완시스템을 마련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이 거대한 이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나의 몫, 우리의 몫이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힘없는 미세한 존재이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무수한 ‘나’들이 모여서 ‘우리’가 되고 ‘대중’이 되면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시스템이 보완되고 완충구가 생기길 요구하는 마음. 디지털시대에서 소외되고 고립되는 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편리함에 젖어들어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마음. 이 마음들을 담아 관련된 책을 읽고, 영상을 보고,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해당 문제와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을 지지하여 제도에 다가가는 일.
이것들을 해내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미세하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몫이니까.
그래서 자주 아이들과 이야기 한다. 기억하려고, 나의 아이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말이다. 따뜻한 음식을 배달해주는 고마운 손, 먼 길을 달려와 물건을 옮겨주는 기사님들의 든든한 두 다리에 감사함을 전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