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성의 현실성 그리고 반(反)작용
심한기
현실이란 무엇인가?
정신의학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진다. 하나는 정신이상(psychotic), 즉 일상적인 유지가 안 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노이로제(neurotic, 신경증으로 분류한다)이다. 이 둘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현실성”이다. 현실이란 같은 시공간(here & now)에서 경험하는 현상으로, 사회적인 약속과 공유가 가능해야 한다. 사회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점은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과거에는 비정상이며 비현실적이었던 것들이 시대나 문화적 변화에 따라 당연한 현실로 변환되기도 한다. 결국, 불변하는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심해봐야 한다.
현실성은 사회 또는 특정 세대나 집단의 권력(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현실과 비현실을 규정하려는 태도나 인식을 자주 흔들어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현실 또는 정상적인 것에 기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 호기심, 열망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루한 일상을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현실과 비정상에 근거한 시도이다. 이런 태도와 시도는 기존의 관성, 관습, 기득권 등을 얕잡아볼 수 있는 발칙한 용기로 진화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상황을 겪으면서 뉴노멀(new normal), 메타(meta), 메타버스(Metaverse),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Z세대) 등의 단어들이 익숙해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소중하게 인식하는 것과 함께, 잊고 살았던 것, 또는 비현실적이란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 세계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문제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속도감이다. 옆을 보지 않고 경제성장에 목숨을 걸며 달려왔던 ‘압축적 근대화’의 경험은 삶의 속도감을 가속화시켰다. 결국 새롭거나 다른 것, 즉 비현실이라 여겼던 것들에 대한 관찰, 이해, 해석, 적용의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었다. 빠른 것에 익숙해지기에 당장 활용이 가능한 기능과 기술에 집착하게 된다. 소통의 방식과 기술은 늘어나지만, 소통의 깊이는 줄어들고 있다. 특히 스스로 인식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문해력(literacy)의 과정이 생략되면서, 새로운 편견과 배제의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쯤 되면 비현실을 현실로 초대하거나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연한 진화로 표현될 수 있는 토대로서의 질문이나 해석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빠른 속도로 가상세계가 현실로 다가오고, 비대면의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성찰하기 위한 질문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타(meta), 즉 추상이나 가상의 세계도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산물이기에 우리의 해석과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
메타(meta)를 추상이나 가상의 세계가 아닌 ‘저 너머’의 세계로 해석해보자.
저 너머는 추상과 가상의 뜻을 포함하지만, 해 보지 않은 것, 관심 없었던 것, 정반대의 것, 있는데 보고 있지 못하는 것 등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일상에서 내가 잘 모르는 것, 관심 없는 것,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초대는 비현실이 되며,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면 ‘비현실성의 현실성’이 된다. 문명과 기술이 알아서 먹여주는 비현실성의 현실성이 아닌 내가 찾아가고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비현실성의 현실성의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보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이나 비현실에 반(反)할 수 있는 작용이 필요하다.
[ 통계에 잡히지 않는 데이터는 보통 무시하고 예외로 따로 넣어두고 끝낸다. 세상은 그 데이터를 벗어난 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反)데이터를 만드는 일이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다. 지배 데이터를 벗어나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데이터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혹은 사회의 시선을 새롭게 만드는 기본 데이터가 되길 희망한다.1]
가상세계는 정보와 데이터의 세계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나 알고리즘은 이미 나의 스마트폰에도 작동하며 기특한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 정보나 데이터를 소비하거나 따라가는 것에 반(反)할 수 있는,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저 너머의 반(反)-작용’은 또 다른 비현실성의 현실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유를 기반한 인문주의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화장의 기술과 같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이미 개념과 이론이 되어버린 사상이나 철학을 반복하고 인용하는 것을 넘어서는 반-작용, 즉 ‘확실성’, ‘절대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마구 던질 수 있는 ‘반-작용’이 필요하다.
메타, 가상, 비현실성에 대한 나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본질적 낭만으로 회귀하고 있다.
[ 아침에 이러나서 밭에 가 보면
꼬치 피고 파란 잎이 팔랑팔랑하는데
너도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얼마나 사랑서럼고 감사한지 몰라요. / 칠곡 할머니 송문자.
할매들의 글에는 문자가 인간에게 주는 환상이 없고, 인간의 문자와 문장 안에 이미 들어와서 완강하게 자리잡은 관념이나 추상이 들어있지 않다. 할매들의 글은 삶을 뒤따라가면서 추스른다. 자라는 것들을 길러서 자라게 하는 일상의 노동에서 할매들은 삶의 고난을 감당해내는 마음의 힘을 키워왔다. 할매들은 생명을 가꾸고 키움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긍정했고, 작은 소출을 귀하게 여겼다.2]
이는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삶의 본질과 지향점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스마트한 디지털 세계와 땡볕에 피어난 도라지꽃을 탐하는 낭만의 세계는 공존한다. 지금의 비현실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흐름에 따르거나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삶의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 너머’의 것들을 호명하며 스스로 그러한 반(反)-작용을 꿈꿔보는 비현실성의 일상도 현실이 될 만하다.
1김월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반데이터의 예술”, 『와리즈아트What Is Art 결과자료집』,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1-02), p.24
2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2019), p.266
심한기
청소년들과 함께 스스로 가능한 주체적 문화와 삶을 만들어가는 독립단체 ‘품 청소년문화공동체’의 대표로 장기집권하다가 현재는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서울시에서 위탁을 받은 ‘서울시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의 센터장으로 살고 있다.
- E-mail.gooddogcho@hanmail.net
비현실성의 현실성 그리고 반(反)작용
심한기
현실이란 무엇인가?
정신의학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진다. 하나는 정신이상(psychotic), 즉 일상적인 유지가 안 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노이로제(neurotic, 신경증으로 분류한다)이다. 이 둘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현실성”이다. 현실이란 같은 시공간(here & now)에서 경험하는 현상으로, 사회적인 약속과 공유가 가능해야 한다. 사회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점은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과거에는 비정상이며 비현실적이었던 것들이 시대나 문화적 변화에 따라 당연한 현실로 변환되기도 한다. 결국, 불변하는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심해봐야 한다.
현실성은 사회 또는 특정 세대나 집단의 권력(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현실과 비현실을 규정하려는 태도나 인식을 자주 흔들어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현실 또는 정상적인 것에 기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질문, 호기심, 열망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루한 일상을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비현실과 비정상에 근거한 시도이다. 이런 태도와 시도는 기존의 관성, 관습, 기득권 등을 얕잡아볼 수 있는 발칙한 용기로 진화하기도 한다.
코로나 19 상황을 겪으면서 뉴노멀(new normal), 메타(meta), 메타버스(Metaverse),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Z세대) 등의 단어들이 익숙해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소중하게 인식하는 것과 함께, 잊고 살았던 것, 또는 비현실적이란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 세계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문제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속도감이다. 옆을 보지 않고 경제성장에 목숨을 걸며 달려왔던 ‘압축적 근대화’의 경험은 삶의 속도감을 가속화시켰다. 결국 새롭거나 다른 것, 즉 비현실이라 여겼던 것들에 대한 관찰, 이해, 해석, 적용의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었다. 빠른 것에 익숙해지기에 당장 활용이 가능한 기능과 기술에 집착하게 된다. 소통의 방식과 기술은 늘어나지만, 소통의 깊이는 줄어들고 있다. 특히 스스로 인식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문해력(literacy)의 과정이 생략되면서, 새로운 편견과 배제의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쯤 되면 비현실을 현실로 초대하거나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연한 진화로 표현될 수 있는 토대로서의 질문이나 해석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빠른 속도로 가상세계가 현실로 다가오고, 비대면의 일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성찰하기 위한 질문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타(meta), 즉 추상이나 가상의 세계도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산물이기에 우리의 해석과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다.
메타(meta)를 추상이나 가상의 세계가 아닌 ‘저 너머’의 세계로 해석해보자.
저 너머는 추상과 가상의 뜻을 포함하지만, 해 보지 않은 것, 관심 없었던 것, 정반대의 것, 있는데 보고 있지 못하는 것 등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일상에서 내가 잘 모르는 것, 관심 없는 것,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초대는 비현실이 되며,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면 ‘비현실성의 현실성’이 된다. 문명과 기술이 알아서 먹여주는 비현실성의 현실성이 아닌 내가 찾아가고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비현실성의 현실성의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보는 거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이나 비현실에 반(反)할 수 있는 작용이 필요하다.
[ 통계에 잡히지 않는 데이터는 보통 무시하고 예외로 따로 넣어두고 끝낸다. 세상은 그 데이터를 벗어난 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반(反)데이터를 만드는 일이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사회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다. 지배 데이터를 벗어나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데이터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혹은 사회의 시선을 새롭게 만드는 기본 데이터가 되길 희망한다.1]
가상세계는 정보와 데이터의 세계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나 알고리즘은 이미 나의 스마트폰에도 작동하며 기특한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 정보나 데이터를 소비하거나 따라가는 것에 반(反)할 수 있는,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저 너머의 반(反)-작용’은 또 다른 비현실성의 현실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유를 기반한 인문주의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화장의 기술과 같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거나 이미 개념과 이론이 되어버린 사상이나 철학을 반복하고 인용하는 것을 넘어서는 반-작용, 즉 ‘확실성’, ‘절대성’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마구 던질 수 있는 ‘반-작용’이 필요하다.
메타, 가상, 비현실성에 대한 나의 스토리텔링은 결국 본질적 낭만으로 회귀하고 있다.
[ 아침에 이러나서 밭에 가 보면
꼬치 피고 파란 잎이 팔랑팔랑하는데
너도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얼마나 사랑서럼고 감사한지 몰라요. / 칠곡 할머니 송문자.
할매들의 글에는 문자가 인간에게 주는 환상이 없고, 인간의 문자와 문장 안에 이미 들어와서 완강하게 자리잡은 관념이나 추상이 들어있지 않다. 할매들의 글은 삶을 뒤따라가면서 추스른다. 자라는 것들을 길러서 자라게 하는 일상의 노동에서 할매들은 삶의 고난을 감당해내는 마음의 힘을 키워왔다. 할매들은 생명을 가꾸고 키움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긍정했고, 작은 소출을 귀하게 여겼다.2]
이는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삶의 본질과 지향점에 대한 나름의 판단이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스마트한 디지털 세계와 땡볕에 피어난 도라지꽃을 탐하는 낭만의 세계는 공존한다. 지금의 비현실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흐름에 따르거나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삶의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저 너머’의 것들을 호명하며 스스로 그러한 반(反)-작용을 꿈꿔보는 비현실성의 일상도 현실이 될 만하다.
1김월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반데이터의 예술”, 『와리즈아트What Is Art 결과자료집』,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2021-02), p.24
2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2019), p.266
심한기
청소년들과 함께 스스로 가능한 주체적 문화와 삶을 만들어가는 독립단체 ‘품 청소년문화공동체’의 대표로 장기집권하다가 현재는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서울시에서 위탁을 받은 ‘서울시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의 센터장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