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을 만들어 온 사람들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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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PEOPLE 1. 품의 일꾼   


 

이준호. 노래품. 품 창단 멤버. 1994년 퇴사 후, 뒤에서만 일함. 

품의 창단멤버이며 1991년 노래품 활동부터 1994년 퇴사까지는 프로그램 기획과 전교조 등과 연대사업을 추진하였다. 내부적인 갈등과 개인적인 고민으로 품을 나간 후 고난의 길(고향에서 농사와 토종닭 요리장, 세일즈맨 등)을 걷다가 사업에 성공하며 품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주었다. 지금은 사업이 어려워져 힘들지만 그는 여전히 품이 흔들릴 때, 혼자 남았던 심한기가 고민할 때, 품의 식구로써, 품이 대소사를 함께 하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품의 아버지이다. 


신석호. 1991년 노래품 ~ 창단 준비. 이후는 뒤에서만 일함

믿기지 않지만 수구선수 출신미여, 어쿠스틱 기타연주와 뉴에이지 음악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품 창단준비만 참여한 후 음악활동에 전념했고 한때는 음반제작도 하였다. 그 간 몇 년간 자동차세일, 기획사 운영, 보험설계, 카페 운영 등등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있다. 


양금석. 품 창단 멤버. 1991년 노래품 ~ 1995년

대학시절 과격한 운동가였고 풍물패, 노래패, 학생 회장 등 욕심 많은 일꾼이었다. 품 창단멤버이며 작곡과 노래 실력도 대단하다. 품에서는 프로그램 기획 등의 일을 함께 했으나 행정과 조직운영에 탁월한 감각이 있었고, 자유롭고 싶은 이준호와는 싸움도 많았다. 퇴사 후 국제교류사업, 캠프장 운영, 서울신대 노조활동 등 그 답게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고 참 어려운 일도 많이 치렀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사무총장, 사단법인 좋은친구들 사무국장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서윤호. 1992년 ~ 1993년

영원한 환경운동가이며 청소년환경교육에 뜻을 두어 초창기 품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품이 환경과 자연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품에서는 1년 간 활동하다가 현재는 프리랜서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병국. 1993년 품 소장 ~ 1994년

서울청소년회관 근무 시 심한기, 양금석, 이준호의 슈퍼바이저로 있다가 1992년 품의 소장으로 활동하였으나 품의 방향성에 대한 이견으로 퇴사 후 벤처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긴 시간이지만 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변하지 않는 스승으로 남아있다. 


양종수. 1994년 재단 창단 ~ 2000년 품 독립전까지(사무국장)

일암 청소년육성재단 창단멤버이며, 품이 재단에서 활동했던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민과 갈등과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독립한 품과 새로 시작한 재단과의 인연의 끈을 이어주게 하는 품 사람들의 선배이기도 하다. 현재는 '청소년과 사람사랑'이라는 법인의 이사장으로 장애청소년대안교육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 


진종호. 1992년 ~ 1997년

품 초창기 개인이 운영하는 사무실이 마땅치 않아 품에 함께 있다가 자연스럽게 품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늦게 결혼하여 너무도 많은 시련을 겪었고, 품이 재단으로 편입되는 역할을 했고 맏형으로 참으로 든든한 품의 선배이다. 개인적으로 일을 벌리고 사고를 치는 타입이라 품을 떠난 후 익산 YMCA 청소년신문 창간, 대안학교 개교 등의 일들을 펼쳤다.


박판기. 1993년 ~ 1997년

심한기와는 동아리 후배라는 악연으로 대학졸업 직후부터 품을 품게 되었고,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보낸 품의 식구였다. 정리정돈과 전래놀이, 종이접기의 대가였으며 품에서 만난 김 령선생과 결혼해 예쁜 자녀들을 키우고 있다. 품을 떠난 후 유아교육사업, 제주도 명도암유스호수텔, 서울청소년지도육성회 근무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최윤희. 1993년 ~ 2000년

품 최초의 실습생으로 출발하여 고난과 희망의 젊은 청춘을 품에서 보낸 장본인이다. 느리지만 노력하는 모습으로 선배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고, 결국에는 청소년전문가로써 자신의 역할을 당당하게 찾았던 잊지 못할 품의 기둥이었다. 품 식구 중 가장 많은 눈물과 가장 많은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힘든 시절 이국진선생의 주선으로 품 활동 중에 만난 이승민선생과 결혼을  시작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방명진. 1993년 ~ 1998년

최윤희 선생과 입사동기이며, 역시 품 실습을 시작으로 청춘을 품에서 보낸 품 사람이다. 선배들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정확하고, 총명한 일꾼으로 심성활동가 소집단 지도전문가였고, 데코를 잘하여 '요술공주'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집안의 반대와 품 활동에서의 고민으로 퇴사한 후, 학원 강사로 지냈으며, 결혼 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제영. 1995년 ~ 1996년. 1998년 '삶의 뿌리를 찾아서' 담당

최윤희, 방명진 선생과 동기이며 뒤늦게 품에 뛰어들었다. 단호하고, 대쪽같은 여장부 스타일로 후배들에겐 공포의 선배이기도 했다. 일에 대한 애착과 욕심이 대단하며 자신에 대한 고민이 많은 잊지 못 할 식구였다. 품 최초의 연구보고서 발간과 청소년연극제를 기획했고, 퇴사 1년 후, 프로젝트 사업인 '삶의 뿌리를 찾아서 2'를 담당하기도 했다. '일천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근무하다가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 귀국했고, 품과의 행복한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이국진. 1997년 ~ 1998년. 2000년 잠시 재입사 후 퇴사

잘 다니던 보라매청소년회관을 그만두고 큰 뜻으로 품을 두드렸지만 품은 그의 뜻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비전을 가지질 못했다. 리더쉽이 강하며 조직과 운영에 약한 품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고, 품에서 영상사업과 미디어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해준 주인공이다. 쌍둥이 아빠로 삶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고, 몇 번의 직장을 경험하다가 한때는 조금 더 넉넉한 미래의 투자를 위해 건축업도 했었고, 이후에도 감마모델연구소, 대학원 진학, 키다리아저씨 화덕피자 등 꿈을 위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상화. 1997년 ~ 1999년

컴퓨터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아리랑 고개에서 살던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품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동선2동 공부방과 청소년회관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준비해온 소리 없는 노력파다. 노래와 시를 좋아하고 남보다 더 큰 감성을 가지고 있다.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는 스타일로 가끔은 주변사람을 힘들게 한 적도 있지만 순수한 심성과 뜨거운 열정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집안의 사정과 개인적인 고민으로, 인연이 깊었던 항국청소년문화연구소에서 활동했었고, 품에서 만난 씩씩한 사회복지사 송향숙선생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사진 없음)

진현실. 1998년 ~ 1999년

품에서 함께 지낸 식구 중 가장 아쉬움이 남고, 퇴사 후에도 유일하게 서로 연락이 되지 않는 후배이다. 그가 생각하는 품에 대한 생각과 비전이 서로 맞지 않았고, 전투적인 삶과 생활을 원하는 품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퇴사하던 시기에도 웃고 정리할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있다. 어느 곳에건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는 후배라 믿고 있다. 


여승현. 2000년 ~ 2001년

1999년 '삶의 뿌리를 찾아서 3'을 시작으로 다음 해부터 품 정식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삶의 뿌리를 찾아서'는 욕심이 많았던 사업이라 준비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일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사람을 여유 있게 키우지 못한 기획자(심한기)의 책임이 유난히 컸던 식구였다. 품의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독특한 감성을 지닌 후배였고, 지역사회사업을 담당하였다. 평소에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다가 당시 '안산 들꽃피는 학교'에서 활동하던 유승권 선생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 품 독립 후, 첫번째로 품을 떠났던 후배라 더욱 가슴에 남아있다. 


박성희. 2000년

품 공채 1기 출신이며 지금까지의 식구들과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던 좀 다른 후배였다.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에 관심이 많았고, 정책방향과 사회운동에도 열의가 많아 다른 식구들과 작은 이견이 있기도 했다. 가끔 개인적 생활패턴의 차이와 무리하게 진행되는 품이 일상에 몸이 따라주지 않아 힘들어 했고, 연대사업에 대한 물꼬를 트려고 노력하다가 1년 간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퇴사한다. 퇴사 후 인권연대, 평화포럼, 코이카 네팔단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정동은. 2000년

품 공채 1기 출신이다. 품이 처음으로 공채를 실시했던 시기는 나름대로 품의 비전, 조직과 운영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추진했던 일이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벌린 오류이기도 했다. 결국 그 당시 식구들은 생각과 비전과 일상 등이 서로 맞지 않는 일이 많았던 책임을 느낀다. 정동은 선생 또한 전투를 해야하는 당시 품의 일상과는 쉽게 결합할 수 없었고, 품은 그의 스타일과 욕구를 충분히 받아줄 수 있는 환경이 되질 못했던 것 같다.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친구이다. 


황선미. 2000년 ~ 2002년

입사원서를 거의 200페이지를 넘게 제출한 품의 기록보유자이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들어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품을 지켜 온 슈퍼우먼이었다. 품의 운영과 재정까지 책임지며, 항상 자신의 스타일로 품과 심한기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품 식구들의 정신적인 지지자까지 되어주며 요란하지 않게 자신의 일을 해왔고, 회원사업과 문화복지아카데미를 담당했다. 


오종환. 2000년 ~ 2001년

대학 1학년부터 품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후배였으며 스스로 삶의 무게를 늘려가는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영화에 관심이 많고, 평소 비디오 가게 사장이 꿈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대학시절에 풍물패 활동을 경험으로 '청소년전통예술한마당'을 진행했으나, 군대에서 다쳐 재발 된 무릎과 개인적인 아픔이 겹쳐 결국 품을 떠나게 되었다. "제가 밉지 않으세요?, 제가 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전화목소리는 여전하며, 지금도 역시 청소년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형미. 2001년 ~ 2003년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야 할 친구였는데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인턴교육 프로그램을 보고 품에 찾아왔다. 풍물패 활동을 했고, 특이한 외모(?)만큼 생각도 특이한 후배였다. 지역사회 공동체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이같은 캐릭터와 성격 덕에 아이들과의 관계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자역사회사업을 담당했으며, 호흡과 내공이 보이기 시작할 쯤 새로운 충전을 위한 아름다운 방황을 하기도 했다. 현재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강명숙. 2002년 ~ 2020년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했던가. 학교를 통해 세상을 만다가 1992년 중3때 만난 품은 다른 세상이었고 한다. 중고등시기 십대와 참여하다 대학생 때 자원활동을 하다 품에 안겼다. 품의 역사가 만든 순환적 구조의 산 증인으로 살았다. 멋모른 막내에서 팀장, 사무국장까지 담당하는 역할의 시간과 다양한 사업을 담당했던 시간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재발견하며 품에서 삶의 진화를 경험했다. 2016년 퇴사 후 품이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은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의 사무국장으로 2년 반 동안 다시 인연을 이어가다 현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최유라. 2002년 ~ 2003년 봄까지

품 8기 실습생 출신으로 노원나눔의 집에서 자원활동을 하였고, 아주 우연한 기회로 품을 찾게 되었다. 지역사회사업을 김형미선생과 함께 담당하였다. 겉으로 보이는 연약함과는 다르게 의지가 강하고 많은 고민을 하는 스타일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힘과 가능성이 보이는 파워건전지였다. 


김미경. 2002년 ~ 2006년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 1기 출신이며, 졸업 후 쉼터에서 근무하다가 새로운 삶의 도전을 작정하고 품에 안겼다. 처음으로의 회기를 위해 삭발을 감행하기도 했던 그녀는 진지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전천후 전사였다. 박성희 선생의 뒤를 이어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를 담당했으며, 2006년 신경성대장염으로 인해 퇴사를 결정했다.  이후 사회복지사이버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용기를 갖고 있는 후배이다. 


김혜진. 2004년 ~ 2006년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 1기 출신이다. 대학 1학년 대 학교에서 들은 심한기의 특강이 그를 흔들어 놓았고, 그 계기로 2002년 품 실습을 거쳐 2004년부터 품에서 일했다. 막 졸업한 초짜 실무자가 그 어렵다는 지역사업을 맡아 3년 간 처절하게 고민하고 몸부림했다. 특유의 유쾌함 때문에 지역에 나가면 그녀의 안부를 묻는 일도 많았지만, 품과의 마지막은 아쉽게도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언제가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지난 시간을 나눌 날이 있기를...


나하나. 2005년 ~ 2007년

중 3때 품을 알았고, 고등학교 때는 집보다 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한기 책상을 탕탕치며, "이 다음에 크면 이거 내꺼예요"했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결국 품에 안겨 그 책상을 3년간 차지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김미경과 함께 교육사업을 담당하였고, 2007년에는 골 때리는 인턴 둘과 함께 지역문화운동팀에서 파란만장한 한 해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하나가 대표가 되는 날이 오면 품은 성공한거다'라고 했던 기대와 달리 그는 품을 떠났지만 행복한 이별이 가능하단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보라. 2006년 ~ 2007년

2005년 청소년연극축제를 통해 안면을 텄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신기하게 품이 네팔과 만났던 시기에 그녀 역시 네팔에 갔다 활동하던 단체에 실천방향으로 고민하다 과감히 나왔던 때 품이 네팔에서 문을 열였다. 절묘한 만남이었다. 네팔 품의 초창기와 함께하며, 터를 닦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 그는 자신이 품에서 배운 것, 네팔에서 얻은 것을 연결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유현희. 2003년 ~ 2013

대학교 4학년 때 1기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를 통해 품을 만나며 강력한 삶의 진동을 느꼈다고 한다. 춘천에 있는 복지관에서 근무하다가 운명처럼 품과 재회하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미쳐 살았던 경험이 품의 청소년 연극축제를 맡아 3년간 행복하게 일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주주운동과 교육사업을 담당, 2010년부터는 대안교육 길찾기 사업을 맡았다. 현재는 네팔에서 만난 앙 상게 세르파와 결혼하여 춘천에서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하니. 2007년 ~ 2013년 

직업으로써 일을 대하지 않는 태도와 살아갈 사람들 간의 교감이 가능한 사람인지를 한 장의 서류와 면접을 통해 판단하기에는 오류가 너무 많아 어지간해서 공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오류를 가볍게 넘겨 품에 입사하였다. 품에서 겨우 3개월 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네팔로 향했고 네팔 품을 오롯이 혼자 감당했다. 사유의 깊이가 깊은 만큼 삶에 대한 고민과 네팔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민은 참으로 깊고 넓었다. 네팔품이 베시마을에 행복한 마을만들기를 한 그 시간 동안 치열하게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마을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섭. 2008년 ~ 2018년

1993년 청소년 시기에 품을 만났다. 품에서 동아리활동, 기획단, 캠프 등 수많은 품의 활동으로 십대시절을 보냈고, 2007년 인턴을 시작으로 품에서 직원으로 활동하였다. 동네의 십대들과 일상의 문화활동을 만들어 가고, 행복한 소통을 만들어 가는 지역문화운동팀에서 일했다. 건강을 위해 품에서 퇴사 후 휴식과 몸돌보기를 하다 현재는 부여에서 청년들을 만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이지성. 2008년 ~ 2009년, 2011년 ~ 2014년

대학교 2학년 때 '무엇을 위해 나의 바구니를 채울 것인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 없이 살다 청년문화실천아카데미라는 교육사업을 통해 품을 만났다.  2008년 ~ 2009년까지 인턴으로 품의 활동가로 동네에서 십대를 만나는 일을 하였고, 2010년 지역의 작은도서관 '생글'에서 도서관지기로 살았다. 2011년 품으로 다시 돌아와 십대와 마을만들기 팀으로 문화와 행복한 일상을 위한 일을 담당했다.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를 끌어올려주는 매력을 가졌으나 갑자기 찾아온 몸의 아픔으로 인해 품을 퇴사하였다. 한동안 회복을 위한 힘든 노력을 했고, 현재는 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자신의 활동을 용기 있게 만들어 가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정이가령. 2011년 ~ 2015

대안학교에서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삶의 이야기를 선물 받으며 사람, 삶, 세상과 만나려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스물셋의 나이에 심쌤을 통해 품을 만났다. 이후 품을 오가며 여섯번째 오~ 히말라야를 함께 다녀오기도 하며 2011년 품에 입사했다. 사람과 교육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담아가는 대안교육 길찾기 사업을 담당했으며, 대안교육이라는 품의 새로운 시도이자 쉽지 않는 도전을 함께 만들어 갔던 장본인이었다. 


이명화. 2012년 ~ 2019년 

심쌤의 강의를 통해 만난 단어 'SELF SO"를 듣고 밤 늦게까지 자신의 삶을 고민하다 품과 인연이 닿았다. 품에서 실습, 인턴, 청년학교 등 짧지 않은 기간동안 여러 활동들을 거치며 품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춰가는 시간이 만들어졌다. 2011년 겨울 오~히말라야를 통해 2주간의 네팔 베시마을과의 만남은 의미있는 지난 경험으로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고, 2012년 네팔품의 활동가로 선택하며 이하니 선생의 다음으로 네팔 품의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네팔에서의 삶으로써의 일상에 대한 고민으로 4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지은 네팔 허그하우스로 인연이 닿은 랑탕지역의 멜람치 마을에서 행복한 삶에 대해 주민들과 함께  마을활동을 이어가다 2015년 발생한 네팔의 대지진을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어냈다. 이를 계기로 품에게도 네팔활동에 대한 질문, 운영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 등이 함께 맞물려 네팔 품 활동을 쉬게 되며 이명화 선생도 네팔의 다른 단체에서 다른 경험을 만들어 가고 있다. 



정규민 2020년 ~ 2022년

고딩시절부터 품에서 어슬렁거리며 애, 어른 가리지 않고 '樂(즐거움)과 火(분노)를 동시에 유발시키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 한 번 입을 열면 당고개역에서 오이도역(총47개 역)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매우 깊은 진지함과 순수함을 지닌 청년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품의 활동가였으며, 마을배움터 낭만공유지의 낭만 주인장으로 살았다. 지금은 커피, 낭만이라는 단어와 연애 중이다.



HISTORY OF PEOPLE 2. 품의 인턴  


김대심. 2000년

살아가는 모습이 단단한 인턴이었다. 뻘쭘한 모습에서 당당한 일꾼으로 바뀐 그를 볼 때마다 사는 맛을 느끼곤 했다. 시나브로처럼 길게 만들어가는 스타일이며, 청소년연극제는 일에 대한 경험말고도 삶에 대한 경험으로 남아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 틈틈히 아이스크림을 들고 불쑥 찾아오기도 했지만 아이엄마이자 사회복지사로 살아가는 슈퍼우먼이 되면서 얼굴본지가 꽤 되었다. 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품의 사람이자 절대 잊혀지지 않을 사람이다. 


김민정. 2000년

웃을 때 눈동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편안한 길 대신 호시탐탐 다른 세상으로 빠져나가려 했고, 인도, 네팔, 아프리카, 국제교류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연극제를 진행했던 1년 동안 자신과 일과 사람들과의 싸움을 많이 했다. 보석 같은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사람으로 역시 얼굴을 못 본지 너무나 오래되었지만, 늘 기억에 남아있는 품의 사람이다. 


강동호. 2000년

강동호 덕택에 품에서도 남도 사투리를 듣기도 하였다. 한때는 택견 고수의 꿈을 갖고 있었던 건강한 청년이었지만 몸이 아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계획이 바뀌기도 했다. 아이들이 풍장 소리에 혼을 불러올만큼 감춰둔 신명을 갖고 있었고, 옆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가슴이 넓은 사람이다. 청소년전통예술한마당은 물론 갖은 일들을 함께 나누었으며, 결혼 후에는 고향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뒤늦게 공부한 연극치료와 관련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선희(사진 오른쪽). 2001년

인턴사원 신청 면접을 보고 겁 없이 품을 찾아왔던 당시 막내소녀였다. 앳띤 선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으나 일에 있어서는 막내가 아니었다. 초등 회원사업, 심지어는 행정과 예산관리까지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졸업 후에도 역시 사회복지의 길을 버리지 않고 있다.


강경미. 2001년

그의 관심사는 평범하지 않았다. 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관심과 활동분야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청소년과 장애인에 대한 애정이 많았으며, 그를 풀어가기 위한 소시오드라마, 연극, 라틴댄스, 재즈댄스, 영상, 사진과 같은 문화적 소통으로 삶을 풀어가는 길을 원했다. 지독히 고독한만큼 지독한 일상의 고민을 끌어안고 살았다. 2001년 장애청소년연극축제에 묻혀 그 많은 에너지를 모두 다 쏟아내었다. 현재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지만, 그 넘치는 특유의 에너지를 여전히 뿜어내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미선. 2001년 ~ 2002년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 사회복지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방송반 활동을 했으며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꾸준했다. 품에서 연극제와 기타 활동을 하며 청소년문화복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과 매력을 갖고 있다. 잠시 가정과 개인의 상황에 대한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용기내어 자신의 길을 선택하여 신월청소년문화센터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오랫동안 만났던 사람과 결혼하여 잘 지내고 있다. 지금은 참 맑은 물살캠프에 두 아이를 보내고 있다. 


황지희. 2001년

장애인과 자신의 삶에 대한 처절한 전투를 가끔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인권과 교육에 대한 애정은 너무 각별했다. 가상공간에서 마련된 자신만의 세계에서 가끔은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철저한 프로정신을 갖고 있던 전사이기도 했다. 삶에 전사인만큼 그가 쓰는 글 또한 전사의 글이었다. 잠시나마 품과 함께 했지만, 그 삶 또한 세상과 싸우는 품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품의 동지이다. 


홍경숙. 2001년 ~ 2002년

사회복지정보원에서 진행하는 정예화캠프와 사회복지순례를 계기로 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충청도 사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숨겨진 여유'를 갖고 있었다. 1년 담당으로 정리되는 인턴교육을 스스로 1년 연장 할 만큼 청소년 연극제에 대한 열정과 욕심이 많았다. 두 번째 진행한 2002년 연극제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며 매우 즐겁게 일했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한 때는 품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스스로 나름대로의 상황들을 극복해가며 살아갔다. 현재는 대전에서 상담가로 일하고 있다. 


김지연. 2002년

일에 대한 욕심이 엄청난 친구였다. 장애청소년사업과 문화기획에 관심이 많아 서울시 장애청소년연극축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푸근하고 편안한 심성도 그만이지만 좋은 일꾼으로써의 가능성도 함께 갖고 있었다. 평소에 웃는 모습은 그 자체가 '자연'이었다. 군포의 당동에 있는 청소년문화의집에서 일하다 품 선배 송향숙 선생의 동생을 소개 받아 결혼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하여 예쁜 레스토랑을 남편과 함께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영호. 2002년

아주 오래 전부터 품 자원활동가였고, 마음은 늘 품에 두고 있는 후배였다. 대학교 4학년때는 틈틈히 전통문화예술한마당과 캠프를 진행했었다. 졸업 후, 청소년수련원에 취직 했으나,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한 결정으로 품에 들어왔다. 품에서 서울시전통예술한마당을 담당했었다. 이리저리 직장을 옮기기는 했으나 늘 청소년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언제가 품에 와서 '술 사줘요~'라고 말하는 김영호를 기다리고 있다. 


홍정모(사진 가운데). 2003년

정모는 고민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학 3학년이 되기까지 자신이 너무 잘났다는 나르시시즘의 늪에 빠져 있다가 품에서 실습하면서 그 늪에서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한 여름 무조건 걸어보기에도 해답은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민을 시작했다. '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에서 다시 풀어보기로 했다. 1년간 품에서 지역사회네트워크에 꿈을 담으로 했다. 신입시절부터 팀장같은 풍모가 풍기던 그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긴 시간동안 일해오다 현재는 강화도에서 팬션을 하며 삶의 다음 페이지를 써가고 있다. 

  

김미현. 2003년

잘 다니던 자활후견기관을 그만뒀다. 역사의 땅 광주에서 복지부랑아(?)로 전전하다 품에 안겼다. 역시 가볍지 않은 용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기에 버리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회원사업과 청소년동아리지도를 담당했다. 영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기도 했고, 청소년수련관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제주에 정착하여 잘 살아가고 있다.


박정희. 2003년

엄마는 광주의 민주 싸움꾼이셨다. 그 덕에 온갖 자유를 누리고 살았다. 5.18관련 사업, 청소년동아리 박람회, 평화축제, 촛불시위 등 도대체 기웃거리지 않은 동네가 없었다. 그런데 처음과 끝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다. 결국 죽음의 품 인턴을 선택했다. 그의 자유는 일 속에서 승화되었다. 제2기 문화복지아카데미를 담당했다. 전라도 광주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현재는 광주로 돌아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장효진. 2004년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 1기 출신으로 춘천에 있는 청소년문화의집에서 1년간 근무하다 역시 새로운 도전을 위해 품 교육인턴으로 1년간 일했다. 품에서 추진했던 전국청소년문화의집 교육지원사업을 담당했고, 1년의 진통 끝에 멋진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품 인턴 활동 후 당동청소년문화의집에서 일하다 결혼 후 상담학석사과정을 끝마치기도 했다. 현재는 참맑은 물살캠프에 아이를 보내며 품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정주. 2004년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를 휴학하고 품 인턴으로 일했다. 에너자이저 유현의 선생과 청소년연극축제를 함께 함은 물론 다른 세상을 꿈꾸기 위한 비판과 고민을 서슴치 않는 당찬 배짱을 지냈다. 인턴 이후에도 품과 함께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다른 세상을 위한 꿈 찾기 역시 'NEVER STOP'이다. 캐다다에서 어학공부를 마치고 엠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고 있는 국제활동가이다. 


고윤희. 2005년

27살이라는 나이에 졸업을 한 일이나 27살이란 나이에 차비도 못주는 품 교육인턴으로 품을 던진 일. 모두 그의 인생관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북한산에서 떨어져 헬기로 구조된 직후 절뚝거리는 다리로 품에서 청소년연극축제를 함께 했다. 그 나이에 비보이 스타를 꿈꾸고, 죽을뻔 했던 산을 그리워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니, 너무 단순한 사람일 수지도... 선과 악이 교차하는 INTER FACE를 당당하게 내밀 수 있는 진정한 전사이다. 


이애란. 2005년

대한민국 바다의 역사를 안고 있는 영광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을 하던 동네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지역운동을 어렴풋이 꿈꿔왔다고 했다. 그래서 품에서의 지역문화운동팀 실습을 아쉬워하며 아예 교육인턴으로 들어왔다. 지역청소년축제기획단 '노올자'를 담당했으며, 괴산에 있는 신기학교에 오랜시간 한 명의 주인으로 살았다. 


유영은. 2006년 ~ 2007년

고교시절 청소년연극축제에 참여했다. 2005년 10회 연극축제 추진위원단으로 합류하며 다시 품과 인연이 되었다. 대학 삼수 끝에 품 대학에 입학해 인턴 재주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품에서 더 큰 세상을 배웠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지역문화운동팀에서 학교문화예술교육을 담당했다. 이후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에이스벤추라'를 거쳐 옥천에서 마을 사랑방을 운영하기도 했고, 중국 연변에서 청년 흔들기도 했다. 


이정연. 2006년

품 5분거리에 있는 덕성여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품에서 열두번째 실습을 했으며, 2006년에 교육인턴으로 활동했다. 덕성여대 노래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던 이력으로 지역문화운동팀에서 특히 밴드 아이들과 신나게 놀며 1년을 보냈고, 이후 이곳저곳 도전정신을 발휘하면서도 축제 시즌이면 어김없이 품에 돌아오곤 했다. 끈기없음의 대명사라고 자처하기도 했지만, 자발적인 의지로 오래도록 열중한 것 두 가지는 음악과 품 생활이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도 했다. 지금은 지역아동센터에서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지금도 가끔 만나 수다를 떠는 오랜 인연이다. 


지현영. 2006년

청소년문화복지아카데미 2기 출신으로 오랫동안 품을 염탐해 오다 장문의 이력서를 써들고 2006년 품을 찾았다. 1년이 좀 못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특유의 뚝심과 우직함으로 깊은 정을 나누었다. 이후 이천의 청소년문화의집에서 근무하다 오랫동안 만나던 사람과 결혼하여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가 불리고 싶어했던 이름, 제인. 제인의 정겨운 사투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까.


안하나. 2010년 품 인턴. 2011년 네팔 품 인턴

현도대 사회복지학과 출신으로 겸손하고 우직하고 순수하다. 심한기의 강의를 들으며 인연이 되어 졸업 후 오 ~히말라야까지 함께 했다가 2010년 품 인턴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네팔 품 인턴을 스스로 선택했고 6개월만 있겠다고 했던 안하나는 1년 반이 지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어디선가 여전히 그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김준혁. 2012년

열여섯, 친구의 소개로 품을 처음 만나 '강북청소년문화축제 추락'의 기획단에 잠시 잠깐 참여. 제대로 축제를 만들어 보겠다며, <청소년축제기획단 세 개>로 품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고3이 아닌 열 아홉이라 외치며 심한기 선생과 함께 한 <세 개와 심한개의 인문학교>에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문학적 시각과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군대를 가기 전 지난 활동을 정리하고 일상생활에서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제대로 채우기 위해 품에 들어왔지만.... 몇 개월이 지나 잠적하고 말았다. 몇 년간 그를 볼 수 없다가 만난 그는 많이 성장해 있었고, 현재는 품에서 서울시에서 위탁한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의 상근활동가로써 당당히 역할을 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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