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 환대의 시공간> - 강구야(영등포문화재단 대표이사&품 주주)

제가 일하는 영등포는 제3차 문화도시 지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지역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문화적 주체를 포함한 주민들과 많은 토론을 거쳐 지역별로 뚜렷한 문화적 특성을 보이는 문화도시 영등포의 슬로건을 ‘우정과 환대의 이웃, 문화생산도시 영등포’로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정을 ‘어려워도 손을 맞잡는 관계’, 환대는 ‘손님같은 주인과 주인같은 손님의 만남’, 그리고 이웃은 ‘이름을 아는 사이’라 정의하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환대의 의미는 실은 품에서 빌려온 언어입니다. 언젠가 청소년문화공동체 품을 방문했을 때, 입구 한 켠에 걸려있던 ‘주인으로서의 손님’이라는 명패가 인상적이어서 찍어둔 사진은 제 사진첩에 십 년이 넘도록 저장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의미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문구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손님인데 주인이 되는 공간이라니! 주인인데 손님이라니! 환대歡待는 ‘크게 기뻐하며 황새를 대접한다’는 뜻을 가졌는데, 도성밖에서 날아온 새를 자신의 방식으로 후하게 대접하다가 새를 곤란에 빠트린 노나라 임금의 우화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장자’를 떠올리게 하는 한자어입니다. 환대의 영어 표현인 hospitality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라틴어 hospes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품에서 이야기하는 환대는 오늘날 영어식 표현의 어원이 갖는 의미에 가까울 듯 합니다. ‘서로의 육체와 영혼이 함께 머무는 시공간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주인이자 손님으로서 함께 거하고 있기에 그곳에서는 쇠귀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함께 비를 맞을 것이며, 랑시에르의 말처럼 ‘배움과 가르침의 위계’ 또한 없을 것입니다.


(예전 품 사무실 앞에 걸려있던 주인으로써의 손님)


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2,000년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며 청소년들의 탈학교 러시와 교실붕괴에 대한 미디어의 앞다툰 보도는 이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학교밖 어디에도 청소년들을 주인으로 환대하는 자리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청소년 기관이나 시설, 그리고 행사에서 그들은 프로그램의 참가자이거나 수혜자 정도의 숫자로 기록될 뿐이었지요. 일부 청소년들이 주체가 된다는 행사를 표방하더라도 막상 들여다보면 청소년들은 프로그램 일부의 진행 정도의 역할을 자원봉사로 하고 있을 뿐이었고요. 하지만 품의 행사에서 청소년들은 청소년기획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사를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였습니다. 특히 동네에서 일없이 놀던 청소년들이 자신의 행사의 주인임을 밝히고 정성스럽게 초대하는 영상을 받고 보면 그 생각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품이 기획한 공간에 초대되어본 사람들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공간이 그곳에 들리고 머무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무위의 서비스입니다. 그래서 편안해집니다. 집들이를 해본 사람들은 알겁니다. 손님들은 집주인을 위한 선물을 잔뜩 안겨두고 가만히 거실에서 집주인이 차려낸 음식과 프로그램을 코스대로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그리고 집주인이 잘 차려낸 서비스를 풀로 받은 집들이일수록 그 집을 나서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집들이 못 하겠다고... 동네지식인 고영직 선생의 말처름 우리는 환대와 응대, 접대를 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입니다. 품에서 지내는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대로 한 사람의 온전한 이름으로 드러납니다. 이건 교사 혹은 스탭들, 그리고 초대된 손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꽤나 긴 편입니다. 품에서 각자의 활동과 인연, 그리고 그 인연의 발자국을 따라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행위는 신성한 의식 같은 느낌마저 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학업과 직업, 사교, 사색, 취미활동을 위해 집을 나선 후 찾게되는 까페, 학교, 회사, 공원 등 수많은 공간과 장소를 떠올려보세요. 그곳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당신인가요? 교장인가요? 사장인가요? 건물주인가요? 아니면 지자체장인가요? 막연히 복수의 의미인 시민, 학생, 노동자라고 말하면 정답에 가깝다고 느껴지시나요? 내가 주인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공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품의 공간은 그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수많은 손님들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줘, 주인이 많아지는 공간이 제가 만난 품입니다.


 인류는 의례를 통해 서로를 환대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존재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회는 생과 사, 그리고 그 사이에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의례를 갖고 있습니다. 목례, 악수, 볼맞춤, 허그 등 개인 간의 의례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우리는 환대합니다. 백일, 돌, 생일, 책걸이, 환영식, 입학식, 졸업식, 성인식, 결혼식 등등 수많은 공동체의 의례를 통해 개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환대하는 행위가 있고요. 이를 사회적으로는 출생신고, 전출입신고, 혼인신고 등등의 의례로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낮과 밤, 비오는 날과 맑은 날, 추운 날과 더운 날 등 한 사람을 위해 전 우주가 움직여,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환대의 의례를 치르기도 하지요. 물론 환대는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어서 누군가는 형식만 남아서, 빈번하게 반복되어서, 아니면 특별할 거 없어서 환대로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매 순간이 환대의 시간이 되기도 할 겁니다. 제게 품의 의례는 특별합니다. 나 자신도 가끔은 잊어버리게 되는 태어났음을 축복하는 품의 엽서를 매년 받고 보면 정말 내가 태어난 게 기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숫자나 제군이 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에게 특별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그래서 투명인간으로 모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존엄의 공간이 바로 제가 만난 품입니다.


(올해 강구야 주주님에게 보낸 주주 생일카드)


역사history는 히스토어(현자)의 이야기라는 어원을 갖는다고 합니다. 기억memory은 Mnemosyne(기억의 여신)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지요. 이 여신은 음악과 시, 서사 등 아홉 뮤즈의 어머니기도 하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기록하는 것을 중요한 학습의 과정으로 삼는 품의 문화는 배움의 활동뿐 아니라 각자가 지역에서 일상으로 만나는 장면과 사람들을 세심히 살피고 알음알음의 인연들이 이어져 이름 아는 마을의 관계를 만들도록 합니다. 이러한 품의 기획은 자연스럽게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 점에서 품은 마을과 기억과 예술의 신들을 환대하는 성전입니다. 강북청소년문화축제가 축제가 지역과 무관하게 청소년들의 ‘끼’나 ‘열정’ 또는 미디어 속 대중문화 흉내내기에 집중하는 여느 청소년 축제들과 달리 지역의 이야기로부터 청소년 당사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는 축제일 수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또한 품이 주도하는 동북권역 마을배움터가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운영되고 있는 많은 공공시설들과 달리 자율적이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