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 강하자
# 요즘 강하자는?
한참 바쁜 시기를 넘기고 숨을 쉬고 있다. 20년도 넘은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을 허물고 다시 짓고 있다. 단독 건물은 아니고 어르신 센터 등 다양한 시설들이 함께 들어선다. 예전에는 청소년 독립공간이 절실하다고 주장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도 세대간의 소통과 이음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 제주도 토박이신가요?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쭈~욱 서귀포에서 놀고 자랐다. 지금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을 하고 있으니 서귀포의 귀신이다. 대학도 역시 제주도를 벗어나지 않았고(못했다가 아님!) 조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전에 호텔 주방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도 못 가고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직업임을 깨닫고 바로 때려쳤다.
# 조리학과 출신인데 어떻게 청소년 쪽에서 일하게 되었나?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녔고 주일교사도 하면서 청소년들과 자주 놀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단체면서 시민단체인 서귀포 YWCA(이하 서귀포 Y)와도 인연이 되었다. 당시 서귀포Y 부회장님이 집에서 놀지 말고 여기와서 일을 해 보라고 해서 서귀포Y 청소년 업무(Y-teen)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3년 5월 14일이 첫 출근이었다. 이쪽에 경험은 없었으나 막상 일을 해보고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나의 삶이 아님을 깨닫고 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신나는 '싸인'이 왔다. 서귀포Y에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을 위탁받으면서 다시 일해보라는 신나는 '콜'이 온거다. 그렇게 2002년부터 시작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을 20년째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당시 청소년지도사 2급 자격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귀포Y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YWCA 연합회 간사로 일했던 조영미(역시 품의 오래된 주주)선생이 지도사 자격증을 따라는 권유가 있었고 어렵게 자격을 딴 것이 이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된거다.
# 영상 인터뷰 도중 조영미, 우수명 주주와의 반가운 인사
영상 인터뷰를 할 때 다른 방에서는 품의 주주 조영미, 우수명 교수가 국제사회복지 집필 관련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인터뷰 중에 조영미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그 조영미가 지금 옆에 있다고 하니 '화들짝' 반가워하며 영상으로 인사를 나눴다. 마침 우수명 교수까지 안면이 있었기에 우수명, 조영미, 강하자 주주의 반가운 인사가 이루어졌다.
# 품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2002년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이하 서청문) 관장을 시작할 때는 나도 경험이 너무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도 체계적인 교육이나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외부의 교육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갔다. 당시에는 YWCA연합회에서 좋은 교육이나 워크숍이 많았었기에 경기도 시흥에 있는 YWCA 버들캠프장으로 교육을 자주 참여했다. 그 교육 중에 김민 교수(순천향대 청소년상담학과 교수, 품의 영원한 주주)와 심한기가 강사로 참여했다. 강의도 잘 듣고 교육이 끝나고 품에도 직접 방문을 했었다. 그렇게 품과의 인연이 시작된거다.
# 심한기가 기억하는 강하자와의 첫 만남. 그리고...
전국 YWCA 지부에서 모인 활동가 30여명에게 강의를 했는데 맨 앞 줄에 앉아서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활동가가 있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흘깃 봤는데 이름이 '강하자'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고 그 이름과 참 어울리는 열정을 기억한다. 그후 품에도 방문을 했고 서귀포Y에서 주관한 Y-teen 지도자(청년) 교육에도 초대를 받았고 하나투어와 품이 주관했던 청소년 여행지원사업에도 서청문이 함께 했었다. 그렇게 품과 강하자 그리고 서귀포Y, 서청문과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년 가까이 품의 주주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품은 늘 마음이 가는 단체였다. 후원을 해달라는 곳은 참 많았지만 직접 변화나 성장을 느낄 수 있고 운동성이 보여지는 유일한 단체가 품이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참맑은물살 캠프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다. 그럼에도 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함께 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곳이다.
# 매년 10월 11월 즈음 품 식구들이 기다리는 것은?
매년 10, 11월 즈음 품에 날아오는 택배 한 박스에는 아주 맛나는 노지 귤이 한가득하다. 강하자 선생의 아버님이 직접 재배하시는 신선한 노지 귤이다. 매년 수확철이 되면 보내주고 싶은 곳에 노지 귤을 보내는데 품은 늘 1순위로 보낸다. 10년 넘게 귤을 보내고 있고 강하자 선생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품 식구들도 그 정성과 맛은 늘 기억하고 있다.
# 품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 품은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이하 숨)를 위탁받으며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렇기에 품이 지녔던 야생성,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품의 정신을 인정하며 응원하기에 품의 정신은 늘 변함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함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숨을 운영하면서도 품이 지켜온 정체성을 놓치 않기를 기대한다.
[품의 사족 : 네 맞습니다. 품의 정신이 흔들리면 숨도 없고 품도 없습니다. 품이 숨을 위탁받은 2018년부터 지금까지 그 정신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주주님들이 품과 숨을 따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품이 숨이고, 숨이 품이기도 합니다. 품이 지향해왔던 것들을 숨에서 실현하고 있고 공동에서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품 주주님들이 기대하는 품의 정신을 잃지 않으며 품 3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해 서귀포 YWCA도 품처럼 30주년입니다. 품과 생일도 비슷합니다. 소박하더라도 서귀포Y와 품이 서로의 30주년을 응원하고 축하는 시간을 만들어 봐요]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건가요?
어릴적에는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처럼) 하지만 지금은 내가 태어난 곳에서 청소년을 만나며 활동하고 있음이 축복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기에 정체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청소년 영역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 열정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열심히 살아온 덕에 이제는 제주도는 물론 청소년 영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인정에 대한 욕구도 내려놓으려 한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사회복지, 돌봄이나 보호쪽으로 일하고 싶다. 아이들과 따뜻한 삶을 나누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깊고 조용하게 서귀포를 지켜가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대학강의도 그만두었더니 일상에서의 여유로움이 있다. 거기에 나이를 먹는건지 내 자신이 여유로워지고 넉넉해지며 마음의 살이 찌고 있음을 느낀다.
# 심한기의 인터뷰 후기(못다한 이야기)
강하자 선생과의 인연을 이어온지 대략 20년이다. 아직도 "샘 변하게 없이 그대로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강하자는 더욱 변함이 없다. 물론 변해야 할 것은 변할 수 있어야 하는게 나이를 먹는 지혜이다. 하지만 20년 전의 열정이나 진정성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강하자가 그런 사람이다. 2003년 첫 강의에서 만났던 강하자와 2022년 영상 통화에서 만난 강하자는 다르지 않았다. 유쾌하고 즐겁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강하자 선생은 29살 나이에 관장이 되었다. 아마도 전국 최연소 관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관장이지 당시 제주도의 상황에서는 조직이나 운영체계는 물론 급여 수준 또한 너무도 열악했었다. 대도시 청소년수련관 초임 급여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자비를 들여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교육을 다니고 기관을 방문했다. 늘 씩씩하고 명랑하고 즐겁고 열정적이었다. 강하자 선생은 스스로를 '매우 이쁘다'라고 생각하며 이뻐지려고 늘 노력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뻐진다는 것은 타자의 눈에 보여지는 아름다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상과 삶에 대한 인정이며 응원이다. 그렇기에 상상하지 못한 아픔을 만났을 때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변함없는 일상을 만들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품과 20년지기 동반자이며 품의 든든한 주주인 강하자 선생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품 30주년 기념 '특별한 인터뷰' 2탄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 강하자
# 요즘 강하자는?
한참 바쁜 시기를 넘기고 숨을 쉬고 있다. 20년도 넘은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을 허물고 다시 짓고 있다. 단독 건물은 아니고 어르신 센터 등 다양한 시설들이 함께 들어선다. 예전에는 청소년 독립공간이 절실하다고 주장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도 세대간의 소통과 이음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 제주도 토박이신가요?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쭈~욱 서귀포에서 놀고 자랐다. 지금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을 하고 있으니 서귀포의 귀신이다. 대학도 역시 제주도를 벗어나지 않았고(못했다가 아님!) 조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전에 호텔 주방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날에 교회도 못 가고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직업임을 깨닫고 바로 때려쳤다.
# 조리학과 출신인데 어떻게 청소년 쪽에서 일하게 되었나?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녔고 주일교사도 하면서 청소년들과 자주 놀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단체면서 시민단체인 서귀포 YWCA(이하 서귀포 Y)와도 인연이 되었다. 당시 서귀포Y 부회장님이 집에서 놀지 말고 여기와서 일을 해 보라고 해서 서귀포Y 청소년 업무(Y-teen)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3년 5월 14일이 첫 출근이었다. 이쪽에 경험은 없었으나 막상 일을 해보고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고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나의 삶이 아님을 깨닫고 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신나는 '싸인'이 왔다. 서귀포Y에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을 위탁받으면서 다시 일해보라는 신나는 '콜'이 온거다. 그렇게 2002년부터 시작한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 관장을 20년째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당시 청소년지도사 2급 자격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서귀포Y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YWCA 연합회 간사로 일했던 조영미(역시 품의 오래된 주주)선생이 지도사 자격증을 따라는 권유가 있었고 어렵게 자격을 딴 것이 이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된거다.
# 영상 인터뷰 도중 조영미, 우수명 주주와의 반가운 인사
영상 인터뷰를 할 때 다른 방에서는 품의 주주 조영미, 우수명 교수가 국제사회복지 집필 관련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인터뷰 중에 조영미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그 조영미가 지금 옆에 있다고 하니 '화들짝' 반가워하며 영상으로 인사를 나눴다. 마침 우수명 교수까지 안면이 있었기에 우수명, 조영미, 강하자 주주의 반가운 인사가 이루어졌다.
# 품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2002년 서귀포청소년문화의집(이하 서청문) 관장을 시작할 때는 나도 경험이 너무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도 체계적인 교육이나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외부의 교육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갔다. 당시에는 YWCA연합회에서 좋은 교육이나 워크숍이 많았었기에 경기도 시흥에 있는 YWCA 버들캠프장으로 교육을 자주 참여했다. 그 교육 중에 김민 교수(순천향대 청소년상담학과 교수, 품의 영원한 주주)와 심한기가 강사로 참여했다. 강의도 잘 듣고 교육이 끝나고 품에도 직접 방문을 했었다. 그렇게 품과의 인연이 시작된거다.
# 심한기가 기억하는 강하자와의 첫 만남. 그리고...
전국 YWCA 지부에서 모인 활동가 30여명에게 강의를 했는데 맨 앞 줄에 앉아서 어마어마한 집중력으로 열기를 뿜어내는 활동가가 있었다. 가슴에 달린 명찰을 흘깃 봤는데 이름이 '강하자'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고 그 이름과 참 어울리는 열정을 기억한다. 그후 품에도 방문을 했고 서귀포Y에서 주관한 Y-teen 지도자(청년) 교육에도 초대를 받았고 하나투어와 품이 주관했던 청소년 여행지원사업에도 서청문이 함께 했었다. 그렇게 품과 강하자 그리고 서귀포Y, 서청문과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년 가까이 품의 주주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품은 늘 마음이 가는 단체였다. 후원을 해달라는 곳은 참 많았지만 직접 변화나 성장을 느낄 수 있고 운동성이 보여지는 유일한 단체가 품이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참맑은물살 캠프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다. 그럼에도 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함께 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곳이다.
# 매년 10월 11월 즈음 품 식구들이 기다리는 것은?
매년 10, 11월 즈음 품에 날아오는 택배 한 박스에는 아주 맛나는 노지 귤이 한가득하다. 강하자 선생의 아버님이 직접 재배하시는 신선한 노지 귤이다. 매년 수확철이 되면 보내주고 싶은 곳에 노지 귤을 보내는데 품은 늘 1순위로 보낸다. 10년 넘게 귤을 보내고 있고 강하자 선생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품 식구들도 그 정성과 맛은 늘 기억하고 있다.
# 품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 품은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이하 숨)를 위탁받으며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렇기에 품이 지녔던 야생성, 독립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품의 정신을 인정하며 응원하기에 품의 정신은 늘 변함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함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숨을 운영하면서도 품이 지켜온 정체성을 놓치 않기를 기대한다.
[품의 사족 : 네 맞습니다. 품의 정신이 흔들리면 숨도 없고 품도 없습니다. 품이 숨을 위탁받은 2018년부터 지금까지 그 정신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주주님들이 품과 숨을 따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품이 숨이고, 숨이 품이기도 합니다. 품이 지향해왔던 것들을 숨에서 실현하고 있고 공동에서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품 주주님들이 기대하는 품의 정신을 잃지 않으며 품 3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해 서귀포 YWCA도 품처럼 30주년입니다. 품과 생일도 비슷합니다. 소박하더라도 서귀포Y와 품이 서로의 30주년을 응원하고 축하는 시간을 만들어 봐요]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건가요?
어릴적에는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처럼) 하지만 지금은 내가 태어난 곳에서 청소년을 만나며 활동하고 있음이 축복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기에 정체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청소년 영역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 열정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열심히 살아온 덕에 이제는 제주도는 물론 청소년 영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인정에 대한 욕구도 내려놓으려 한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사회복지, 돌봄이나 보호쪽으로 일하고 싶다. 아이들과 따뜻한 삶을 나누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깊고 조용하게 서귀포를 지켜가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대학강의도 그만두었더니 일상에서의 여유로움이 있다. 거기에 나이를 먹는건지 내 자신이 여유로워지고 넉넉해지며 마음의 살이 찌고 있음을 느낀다.
# 심한기의 인터뷰 후기(못다한 이야기)
강하자 선생과의 인연을 이어온지 대략 20년이다. 아직도 "샘 변하게 없이 그대로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강하자는 더욱 변함이 없다. 물론 변해야 할 것은 변할 수 있어야 하는게 나이를 먹는 지혜이다. 하지만 20년 전의 열정이나 진정성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강하자가 그런 사람이다. 2003년 첫 강의에서 만났던 강하자와 2022년 영상 통화에서 만난 강하자는 다르지 않았다. 유쾌하고 즐겁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강하자 선생은 29살 나이에 관장이 되었다. 아마도 전국 최연소 관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관장이지 당시 제주도의 상황에서는 조직이나 운영체계는 물론 급여 수준 또한 너무도 열악했었다. 대도시 청소년수련관 초임 급여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자비를 들여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교육을 다니고 기관을 방문했다. 늘 씩씩하고 명랑하고 즐겁고 열정적이었다. 강하자 선생은 스스로를 '매우 이쁘다'라고 생각하며 이뻐지려고 늘 노력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뻐진다는 것은 타자의 눈에 보여지는 아름다움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상과 삶에 대한 인정이며 응원이다. 그렇기에 상상하지 못한 아픔을 만났을 때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변함없는 일상을 만들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품과 20년지기 동반자이며 품의 든든한 주주인 강하자 선생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