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公共)이 공(空)이면 어떨까?

202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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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公共)이 공(空)이면 어떨까?


심한기



품청소년문화공동체 30주년 기념행사 사진


품청소년문화공동체(이하 품)는 2022년 작년 30살 잔치를 했다.

30년이란 시간의 깊이와 넓이가 잘 잡히지도 않을 정도이지만 더 길고 깊은 역사와 서사를 담고 있는 오래된 단체들에 비하면 아직 청년이다. 얼마 전 품 30살의 서사를 정리해보고 그동안의 시간들을 담은 기념행사를 하면서 다시 발견되어진 것들이 적지 않았다. 오류와 실수도 많았고 바꿔가야 할 것들도 적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30살이란 나이가 부끄럽지만은 않은 이유가 있다. 정체되지 않으려는 노력, 끊임없이 움직이려는 내적 동기와 의지, 학습하고 기록하는 태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해석해보려는 시도들이 그러하다. 이를 통해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연결성을 찾아왔고, 관계와 인연과 이야기의 기록과 재해석을 멈추지 않으며 나이를 먹는 만큼 유연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이를 먹는 만큼 유연해지면서 공공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도 함께 이어졌다. 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응원과 힘으로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던 품이 공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품이 체감하는 공공이란 늘 닫혀있는 형식과 규율에 갇혀있는 근대적 관성의 산물이었지만 공공을 다시 읽어내고 새로운 공공의 담론과 실천력을 만들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즉 ‘자유롭게 신나게 하고 싶은 것들을 공공으로 전환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가고 싶었다. 

서울시와 품청소년문화공동체의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위·수탁협약서


그리고 품은 2018년 1월 9일 서울시 제1호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이하 숨)의 위탁을 증명하는 협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품 역사상 첫 공공과의 약속을 위한 아름다운 증명서였다. 서울시와의 밀고 당기는 긴 논의과정을 거쳐 협약서의 첫 머리의 멋진 전문도 함께 만들었다. 갑과 을의 수직적 조약이 아닌 상호협력과 동반자로서의 감동적인 약속이었다.

이렇게 멋진 첫 시작으로 한 개별단체의 서사와 욕망들이 공공 속으로 녹아나기 시작했고 이는 개별의 사적욕망을 공공이름으로 채우려는 의도가 아닌 기존의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을 찾아가는 신나는 과정이었다. 숨을 시작하기 전부터 ‘Commons’ 대한 고민과 내부적 학습을 시작했고 ‘신나는 마을배움의 공유지’라는 미션으로 숨을 시작할 수 있었다.



품30년의 경험과 고민들을 연결하며 삶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환대받고 성장할 수 있는 청소년 실험 프로젝트를 발굴했고, 청소년을 만나고 있는 동북사구의 활동가들의 내적성장과 진정한 연대의 힘을 연결했고, 청소년 마을배움의 새로운 담론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방식, 결과에 대한 공유 워크숍과 매뉴얼을 제작하며 이전보다 더 파급력 있는 공공적 아카이빙도 시도했다. 그리고 품이 경험하지 못했던 행정과의 소통이나 협력의 방식들을 함께 배워갔다. ‘아.. 이 정도면 할만하다’ 라며 타 지역이 단체나 공공시설에 좋은 사례로서 전달되기도 하며 공공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런데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상황은 급하게 변해갔다. 모든 공공의 영역이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고 나름의 각오와 준비도 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서울시장이 누가 되었건 서울시장이란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역할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5년간 치열하지만 신나게 ‘청소년 마을배움의 공유지’를 만들어왔던 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이하 숨)의 문이 닫혔다.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은 것이 아니기에 닫혀 버린거다.



 5년 간의 진정성 있는 노력 그리고 부당하고 일방적인 행정력에 대한 싸움의 과정은 지금의 결과에 그 어떤 근거로서 작동되지 않았다. 숨과 함께 아이들, 청년, 활동가들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울림이 되었다. 너무도 간단하고 간편하게 그릇을 비워 버린거다. 숨은 시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공의 시설임에도 사적재산처럼 새 주인의 의도나 판단에 의해 너무도 쉽게 그릇의 용도를 바꿔 버린거다. 결론적으로 공공의 행정이란 것은 여전히 주인장의 개별적 욕망, 이념, 관성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싸움의 방식을 우리가 몰라서 무너진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을 열심히 배우면 되는 것인가?

공공에게 ‘팽’당한 이들끼리 모여서 가열차게 연대하고 투쟁하면 되는 것인가?

공공의 행정은 무시하고 우리끼리만의 공공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인가?

답답해도 정당성을 만들어가며 상호의 이해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이어가야 하는가?

아직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닫힌 ‘숨’을 뒤로하고 히말라야 네팔로 떠났다. 이른 아침 티베트 불교 사원에 앉아 불경을 읽는 승려들을 마주한다. 그들이 읽는 불경 속에는 ‘공(空)’이란 단어가 있다. 매우 복잡한 원리를 가지고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이다. ‘온전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관계하고 있으며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緣起)와도 연결된다. 공공이란 것도 개인적인 것과 완전하게 분리하여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것의 결과에는 원인이 있듯이 우리가 해결해야 문제들의 원인을 제대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모두의 공공이 아닌 내 안의 공공성을 먼저 찾아보는 것과 내 안의 공공성을 다시 해체하고 설계해봐야 할 것 같다.

 

평온한 사원 안에서 넉넉한 감각이 채워지니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공공(公共)이 공(空)이면 어떨까?

공공은 개별존재의 탐욕이 공(空)이어야 한다.

공공은 개별존재의 이념이 공(空)이어야 한다.

공공은 개별존재의 관성이 공(空)이이야 한다.

공공은 진정한 의미는 공(空)이다.



*이 글은 웹진 공유도시 13호 (2023년 3월) - 연결(LINK)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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