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은 품는 만큼 품이 된다.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심한기
# 품! 이런 반가운 단어 같으니라고...
올해로 딱 33년을 ’품‘ (품-청소년문화공동체)이란 단어와 함께 살아왔다. 중간에 ’숨‘(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숨)으로 5년 정도 잠시 외도를 하긴 했지만 나에게 ’품‘이란 삶의 놀이터이자 영혼의 시공간이자 인연의 플랫폼이란 뜻을 지닌 특별한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춘천문화매거진 ’pot’ 가을호의 주제가 ‘품’이란다. 황량한 모레사막에서 헤어졌던 도마뱀 형제가 조우를 한 듯 한 기분이다. 여전히 정주의 기준 또는 살만한 도시의 기준은 늘 투자의 조건이나 대학 진학을 위한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기에 ‘조건이 좋은 도시가 아닌 여지가 있는 도시’를 꿈꾸는 그런 의도가 반가운거다. 도시를 과도하게 치장하며 맛집이나 화려한 이벤트로 온갖 호객행위를 헤대고 있는 도시정책의 비겁함을 때려줄 수 있기에 더욱 반가운거다.
# 마을을 품은 품.
십대와 청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품 청소년문화공동체(이하 품)는 거대도시가 요구하는 보편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가장 촌스럽지만 정겨운 강북구와 도봉구 언저리에 거주하며 지금의 도시가 품으려 했던 ‘도시의 좋은 조건’이 아닌 ‘도시의 여지’ 즉 ‘도시 속의 품’을 만들어왔다. 중딩 나이에 직업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고, 고딩이 되어서는 대학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시간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십대들과 ‘내 삶은 내가 기획한다.’라는 발칙한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건과 환경을 따라만 가지 않고 스스로 가능한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가겠다는 의도이며 의지이다.
행정구역이 정해준 경계를 무시하고 호기심과 심심함으로 무장한 십대들과 함께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끊임없는 말걸기를 했고, 동네시장이나 공터를 찾아 엉뚱한 짓을 반복했고, 심지어 구청을 점령하여 경직된 공무원들의 얼굴 펴주기와 같은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시도들이 연결되어 온 동네가 함께 하는 ‘탈세대, 탈동네, 탈문화 장터’가 매달 열렸고 십대와 청년들이 마을을 초대해서 놀아보는 ’강북청소년문화축제 추락‘을 25년간 이어왔다. 25년 간의 시간 속에 스스로 가능한 십대들의 일상 문화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마을 곳곳의 공간과 공간의 문이 열리며 모두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세대 간의 소통이 가능한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지고, 십대가 청년이 되고 청년이 성인으로 연결되어 도시(마을)의 서사를 순환시키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집값이 뛰고, 소득이 올라가고, 강남에 버금가는 학군이 만들어지는 ’좋은 조건‘들이 생겨나지는 않았지만 일상 속의 여유를 마주할 수 있는 호흡 만들어지고,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과 행위 간의 접촉이 생겨나고, 무심했던 것들의 경계가 흔들릴 수 있는 ’품‘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공적인 성과로 내밀기도 힘들지만 ’착각의 이미지‘로만 꾸며지는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삶 속의 여지‘가 생겨났음은 확실하다.
# 가두는 ’품‘보다는 열어주는 ’품‘으로
무엇을 품는다는 것은 ’내 안으로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날려 보내기 위한 따뜻함‘의 의미가 있다. 엄마의 따뜻한 품이란 엄마의 품속으로 아이들 안전하게만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유로운 사유와 행동과 선택을 품어주는 따뜻함이다. 다양함을 품는다는 것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각의 다양함들이 서로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품는다는 것은 그냥 손만 벌리면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늘 살피고, 먼저 말걸기를 하고, 같은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고, 생각이나 마음만이 아닌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과 환경을 차근차근 만들어갈 수 있는 도시라면 따뜻한 품과 넉넉한 여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영토만을 고집하지 않고 또 다른 영역을 만나보고 꿈꾸며 더 넓은 세상 밖 유목할 수 있는 여지로서의 품도 가능할 것이다.
내 안에 품이 있어야 타자를 품을 수 있고, 집단의 품이 있어야 다른 집단을 품을 수 있고 도시의 품이 있어야 또 다른 도시를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춘천의 품이 춘천을 품고, 춘천의 품이 또 다른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품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춘천이여 세상을 품어보자.
품은 품는 만큼 품이 된다.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심한기
# 품! 이런 반가운 단어 같으니라고...
올해로 딱 33년을 ’품‘ (품-청소년문화공동체)이란 단어와 함께 살아왔다. 중간에 ’숨‘(서울시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숨)으로 5년 정도 잠시 외도를 하긴 했지만 나에게 ’품‘이란 삶의 놀이터이자 영혼의 시공간이자 인연의 플랫폼이란 뜻을 지닌 특별한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춘천문화매거진 ’pot’ 가을호의 주제가 ‘품’이란다. 황량한 모레사막에서 헤어졌던 도마뱀 형제가 조우를 한 듯 한 기분이다. 여전히 정주의 기준 또는 살만한 도시의 기준은 늘 투자의 조건이나 대학 진학을 위한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기에 ‘조건이 좋은 도시가 아닌 여지가 있는 도시’를 꿈꾸는 그런 의도가 반가운거다. 도시를 과도하게 치장하며 맛집이나 화려한 이벤트로 온갖 호객행위를 헤대고 있는 도시정책의 비겁함을 때려줄 수 있기에 더욱 반가운거다.
# 마을을 품은 품.
십대와 청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품 청소년문화공동체(이하 품)는 거대도시가 요구하는 보편적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가장 촌스럽지만 정겨운 강북구와 도봉구 언저리에 거주하며 지금의 도시가 품으려 했던 ‘도시의 좋은 조건’이 아닌 ‘도시의 여지’ 즉 ‘도시 속의 품’을 만들어왔다. 중딩 나이에 직업 선택을 강요받아야 하고, 고딩이 되어서는 대학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시간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십대들과 ‘내 삶은 내가 기획한다.’라는 발칙한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건과 환경을 따라만 가지 않고 스스로 가능한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가겠다는 의도이며 의지이다.
행정구역이 정해준 경계를 무시하고 호기심과 심심함으로 무장한 십대들과 함께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끊임없는 말걸기를 했고, 동네시장이나 공터를 찾아 엉뚱한 짓을 반복했고, 심지어 구청을 점령하여 경직된 공무원들의 얼굴 펴주기와 같은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시도들이 연결되어 온 동네가 함께 하는 ‘탈세대, 탈동네, 탈문화 장터’가 매달 열렸고 십대와 청년들이 마을을 초대해서 놀아보는 ’강북청소년문화축제 추락‘을 25년간 이어왔다. 25년 간의 시간 속에 스스로 가능한 십대들의 일상 문화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마을 곳곳의 공간과 공간의 문이 열리며 모두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세대 간의 소통이 가능한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지고, 십대가 청년이 되고 청년이 성인으로 연결되어 도시(마을)의 서사를 순환시키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집값이 뛰고, 소득이 올라가고, 강남에 버금가는 학군이 만들어지는 ’좋은 조건‘들이 생겨나지는 않았지만 일상 속의 여유를 마주할 수 있는 호흡 만들어지고,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과 행위 간의 접촉이 생겨나고, 무심했던 것들의 경계가 흔들릴 수 있는 ’품‘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공적인 성과로 내밀기도 힘들지만 ’착각의 이미지‘로만 꾸며지는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삶 속의 여지‘가 생겨났음은 확실하다.
# 가두는 ’품‘보다는 열어주는 ’품‘으로
무엇을 품는다는 것은 ’내 안으로 가두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날려 보내기 위한 따뜻함‘의 의미가 있다. 엄마의 따뜻한 품이란 엄마의 품속으로 아이들 안전하게만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자유로운 사유와 행동과 선택을 품어주는 따뜻함이다. 다양함을 품는다는 것은 다양함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각의 다양함들이 서로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품는다는 것은 그냥 손만 벌리면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의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늘 살피고, 먼저 말걸기를 하고, 같은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고, 생각이나 마음만이 아닌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과 환경을 차근차근 만들어갈 수 있는 도시라면 따뜻한 품과 넉넉한 여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영토만을 고집하지 않고 또 다른 영역을 만나보고 꿈꾸며 더 넓은 세상 밖 유목할 수 있는 여지로서의 품도 가능할 것이다.
내 안에 품이 있어야 타자를 품을 수 있고, 집단의 품이 있어야 다른 집단을 품을 수 있고 도시의 품이 있어야 또 다른 도시를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춘천의 품이 춘천을 품고, 춘천의 품이 또 다른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품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춘천이여 세상을 품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