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네팔 낯선땅, 한국여성이 '희망'을 일구다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20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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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낯선땅, 한국여성이 ‘희망’을 일구다

[21세기 코리안 디아스포라]
① 국외에 뿌리는 엔지오의 씨앗

19세기 중반 이후 100년 넘게 근대 한국인의 해외 이주를 이끈 동력원은 식민·독재·가난이다. 한인 이주 1·2세대의 삶엔 피맺힌 역사와 정치의 그림자가 짙다. 20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슬픈 디아스포라(이산)’다. 대략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분기점으로 크게 늘고 있는 21세기 한인 디아스포라의 빛깔이 달라졌다. 기회와 도전, 새 삶의 방식 따위를 찾아나서는 이들이 많다. 슬픈 역사와 정치보다는 개인의 욕망이 주된 동력원이다. 국제 엔지오 활동가, 해외 민박집 주인, 국제 인턴, 워킹홀리데이 참가자 등 6차례에 걸쳐 ‘세계로 나가는 21세기 한국인’의 모습을 세밀화로 그린다.



 

‘비욘드 네팔’ 활동가 정성미씨
창구마을 주민들 삶에 녹아들어
“여행객 이렇게 맞이해보세요”
새 농법 전수 이어 변화 이끌어

 



창밖 하늘이 희뿌윰했다. 힌두교의 신들에게 아침 공양을 올리러 가는 마을 주민들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네팔의 유서 깊은 도시 박타푸르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9월15일 새벽 5시30분. ‘비욘드 네팔’의 활동가 정성미(48)씨와 신성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인근 창구마을로 출발했다. 이날은 정성미씨가 창구마을에서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관광 프로그램 만들기’를 강의하는 첫날이다. 1시간30분 걸려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마을 주민 20여명이 이미 와 있었다. 애초 강의를 신청한 인원은 25명인데 5명이 친척 장례식에 갔으니 모두 참석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 프로그램의 실무자인 나란잔 슈레스타(23)가 귀띔했다.


‘마을 공동체 관광’은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후원을 받아 여행객이 마을 주민들의 집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부엌·침실·화장실 등 집안 시설을 고쳐주는 프로그램이다. 창구마을은 트레킹족들이 많이 찾는 나가르코트 길목에 있고 경관이 빼어나다. 잘만 하면 여행객들 사이에 좋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동네라고 입소문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성미씨는 ‘시설 완비’ 이전에 마을 주민들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나선 이유다. “왜 관광객들은 마을에서 묵지 않고 호텔로 갈까요?” 정씨의 질문에 주민들이 입을 모았다. “우리는 인터넷도 없어요” “큰 방도 없어요.” “말도 통하지 않아요.” 정씨는 주민들을 네 모둠으로 나눠 “호텔엔 없고, 창구마을에만 있는 것”이 무엇인지 대화해 보라고 했다. “풍경이 아름다워요.” “새소리가 들려요.” “다양한 축제가 있어요.” “도시 사람들보다 덜 이기적이에요.” 긍정적인 반응들이 나오자 정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네팔어를 전혀 못하는 외국인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어찌할지 연습하게 했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손짓발짓, 그림으로 대화에 성공했다. “염소젖을 먹고 싶다고?” “버스 타고 카트만두 가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정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외국인 손님맞이를 두려워할 건 없다며, 위생·환경 면에서 무엇을 고쳐야 할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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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아닌 동네사람…네팔 화장실에서 교육까지 바꾼다



‘비욘드 네팔’의 정성미씨
한국서 만난 네팔인과 의기투합
새 농법·관광·교육사업 전수
생리대 하나로 여성자립 일깨워

 



2시간 남짓한 강의가 끝났다. 방금 짠 염소젖으로 만든 차 ‘찌야’를 후후 불며, 마을 주민 데바카 슈레스타(40)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른 엔지오들은 행사에 오면 참가비를 줘서 다들 돈을 기대한다. 하지만 비욘드 네팔은 그렇지 않은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욘드 네팔이 창구마을에 와서 새 농법을 가르쳐줬을 때는 사람들이 배우기만 하고 실행하진 않았다. 그러나 배운 대로 하면 소출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들 따라하게 됐다”고 말했다. ‘비욘드 네팔’은 2010년부터 창구마을에서 순 따주기, 고랑·이랑 만들기, 달걀껍질을 이용한 거름 만들기, 병충해 막는 풀을 이용한 농사짓기 등을 실험하고 있다.


정성미씨가 네팔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2008년 성공회대 석사 프로그램인 아시아시민사회지도자과정(MAINS)에서 함께 공부한 네팔 변호사 출신 사치트 로찬 자(37·Sachit Rochan Jha)와의 만남이다. 대학 시절 야학 교사 노릇을 한 정씨는 성미산 마을학교 교사를 거쳐 당시 두레생협의 공정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필리핀 등을 자주 오가며, ‘제3세계에서 지내며 시민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싹트던 때, 사치트를 만났다.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 변호사의 길을 접고 농촌재건운동단체(RNN)에 뛰어든 사치트는, 한국 시민운동의 역동성에 감화를 받은 터였다. 사치트는 “네팔의 엔지오는 3만개가량 되는데, ‘달러를 벌어오는 회사’라고 불릴 만큼 외부 지원금을 따낼 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한국의 엔지오처럼 ‘돕는 법을 개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외국의 원조기금을 받아 이를 나눠주는 일 말고, 새로운 활동 마인드를 가진 단체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둘은 2009년 ‘비욘드 네팔’을 만들었다. 이들은 ‘구상’(정성미)과 ‘실행’(사치트)을 나눠 맡아 유기적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비욘드 네팔은 청년 교육 사업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럽시캔디(네팔에서 많이 자라는 럽시나무의 열매를 이용한 젤리 같은 사탕) 판매망 구축, 분뇨를 이용해 퇴비를 쉽게 만들 수 있는 친환경 화장실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특히 성공을 거둔 것은 대안생리대인 ‘써질로 냅킨’(써질로는 네팔어로 쉽다는 뜻)을 제작·보급·홍보하는 활동이다. 1년에 2만개를 제작할 만큼 인기가 높다. 여성의 지위가 낮은 네팔에서 예쁘고 위생적이며 만들기 쉬운 친환경 대안생리대를 보급하는 것은, 여성들이 자기 몸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정씨는 생각한다. 1년6개월째 비욘드 네팔에서 대안생리대를 만들고 있는 마을 아가씨 수쿠라니 타망은 “여기에 안 왔다면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했을 테지만 행복하진 않았을 거 같다”고 말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13살에 겨우 글씨를 배운 수쿠라니는 “예전엔 비욘드 네팔 사무실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집까지 가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이젠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남동생의 부인, 오빠의 부인, 여동생에게도 이렇게 무서워하지 않고 사는 법을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비욘드 네팔에선 25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최근엔 ‘카페 비욘드’라는 레스토랑을 열어 수익금을 활동에 보태고 있다. 비욘드 네팔이 4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정씨가 쌓아온 시민운동 네트워크 및 경험에 현지인인 사치트의 활동이 결합한 덕분이다. 비욘드 네팔은 한국국제협력단을 비롯해 유럽의 공익재단 등에 프로젝트 계획서를 제출해 관련 사업비를 받아 운영한다. 네팔인들을 한국에 연수 보내기도 하고, 한국의 청소년·시민활동가들이 네팔을 방문해 교육을 받도록 다리를 놓기도 한다. 네팔뿐 아니라 한국에도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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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화공동체 ‘품’의 이명화씨
도서관 짓고 마을신문 제작 3년
“큰 단체는 서류쓰기도 바빠
나처럼 주민과 친해지기 힘들다”

 

정씨가 일하는 박타푸르시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베시마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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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화공동체 ‘품’이 네팔에 파견한 활동가 이명화(25)
씨가 산다. 9월18일 만난 이씨는 이 마을의 하나뿐인 학교 ‘레 모노하라 공립학교’에서 아이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도 ‘하하하하하~’ 하고 웃음꽃 활짝 핀 얼굴로 맞는다. 90가구 정도가 사는 베시마을에서 레모노하라 학교 도서관을 운영하는 게 이씨의 주요 일과다. 20평 정도 되는 학교 도서관은 품의 지원을 받아 2009년에 만들어졌다. 바닥 장판이 너덜거리고 동화책들도 낡았지만 아이들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한테도 사랑받는다. 먼지로 뒤덮인 멍석이 깔려 있는 다른 교실들보다 훨씬 깨끗했다. 이씨는 이곳에서 리코더 강습을 하고, 마을 친구들과 한달에 한번씩 마을신문을 만든다.


그의 바람은 네팔인들과 동네 사람처럼 살아가는 거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이씨는 한국에서도 마을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강원도 철원, 전남 곡성의 시골마을에 들어가 살아보기도 했다. 2년 전 우연히 베시마을에 온 이씨는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노인들만 남은 한국 농촌과 달리, 베시마을엔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씨는 낯선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마음을 나누는 네팔 특유의 공동체성에 끌렸다.


이날 저녁때도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들이 이씨를 발견하곤 소리치며 반가워했다. 황금빛 석양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들판에서 이씨는 “나마스테”를 외치며 화답했다. 냉장고도 방충망도 없고,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환경에서 이씨가 혼자서 꿋꿋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이 마을 젊은 여성인 카말리와 무나 덕분이다. 열정적이고 집중력이 높은 카말리는, 여자가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 남편 마을로 가는 관습을 깨고 남편과 함께 베시마을에 집을 짓고 산다. 5년 전 이씨의 전임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남성들은 도중에 그만뒀지만, 카말리는 지금 ‘품’의 정식 직원이다. 카말리와 이씨가 주도해 만드는 마을신문은 3년 전 시작해 지금껏 한달도 거르지 않고 34호를 펴냈다. 34호 1면엔 플라스틱 재활용 방법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2면엔 마을 가게 주인 인터뷰, 3면엔 새로 이사 온 주민과 원주민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마지막 면엔 신문값을 낸 사람들 명단을 실었다. ‘품’은 이 신문을 1부에 5루피(53.4원)씩 받고 파는데, 33호를 돈 주고 산 사람은 55명이었다.


9월18일 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네팔답게, 이씨의 집 전깃불이 나갔다. 촛불 아래서 손으로 모기를 휘휘 쫓으며 그에게 물었다. 다른 큰 단체에서 일하면 좀더 편하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지역 일대에서 일하는 한국 단체만 해도 36개. 그중에서 ‘품’은 규모가 가장 작다. 그는 “큰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컴퓨터 앞에서 서류 작업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요. 저처럼 네팔인들과 친밀하고 깊이있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요. ‘품’이 작아서 전 행복해요.”


 

박타푸르(네팔)/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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